AI 경제 대전환 연구 —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AI 경제 대전환 연구 —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앤트로픽 「경제정책 프레임워크」(2026.6)에 대한 한국판 응답 — 중립 코어 마일스톤


0. 이 문서는 무엇인가

이 글은 중간 기착지의 기록이다. 끝난 연구가 아니라, 지금까지 온 길을 한자리에 모아 묶은 마일스톤이다. 세 가지를 차례로 묻는다. 왜 이 연구를 시작했는가. 무엇을 목표하는가. 그래서 어디까지 왔는가. 이 세 물음이 문서의 뼈대다.

담는 범위는 중립 코어까지다. 증거와 논리로 짠 분석 다섯 마디와 그것을 묶는 종합 한 마디, 그 앞에 놓인 출발 텍스트와 연구계획까지를 다룬다. 독자를 겨냥한 주장 층(정부 브리프·정당 제안·기업 제안)은 아직 비어있다. 이 문서는 그 직전에서 멈춘다. 본격적으로 주장으로 넘어가기 전, 코어가 어디까지 단단해졌는지를 확인하는 자리다.


1. 왜 시작했나

출발 텍스트

앤트로픽이 2026년 6월 10일 「경제정책 프레임워크」[1]를 냈다. AI가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하는 시대를 위한 정책안이다. 같은 날 발표한 안전 규제용 'Advanced AI Framework'와 짝을 이룬다.

이 텍스트의 시각은 분명하다. AI가 잠재력의 일부만 실현해도 전례 없는 풍요가 온다. 그러나 그 풍요는 인간 노동에 대한 수요 감소를 수반한다. 그래서 중심 과제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다. 프레임워크는 실업률을 셋으로 나눈다. 5% 안팎의 1단계는 충격에 대비하는 구간이다. 보편 사전분배 자본계좌, 임금보험, 직업훈련을 제안한다. 10% 안팎의 2단계는 한시 소득지원과 재훈련으로 버틴다. 역대 최고 실업의 3단계에 이르면 소득 대체로 전환한다. 새로운 세원을 만들고 재분배 장치를 켠다. 모든 단계의 토대로 셋을 든다. 측정, 분석, 전달이다. 통계를 현대화하고, AI를 추적할 정부 조직을 두고, 실업보험 인프라를 손본다.

이 가운데 앤트로픽이 깊이 파고든 장치는 둘이다. 하나는 사전분배형 자본계좌다. 모든 국민에게 자본의 지분을 미리 나눈다. 미국은 출생할 때 종잣돈을 넣는 계좌로 첫발을 뗐다. 다른 하나는 지분 공유다. 논리는 단순하다. 노동의 실효세율이 자본보다 높다. 소득이 노동에서 자본으로 흘러가면 세제가 거두는 몫이 줄어든다. 그래서 새로운 세원이 필요하다. 프레임워크는 분배의 후보로 보편기본소득과 AI 국부펀드, 노동자 부분소유, 대폭 확대한 자본계좌를 늘어놓고, 세원의 후보로 자본이득세와 소비세, AI 사용 부과금, 디지털 배당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확신이 낮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 불확실을 연구 투자로 메우겠다고 한다. 약속한 재원은 모두 3.5억 달러다.

한국에서 어긋나는 입력값

이 프레임워크가 제시하는 미국 틀은 한국에 그대로 옮겨 심을 수 없다. 입력값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틀의 가정은 셋이다. 높은 성장, 노동 대체, 커지는 세원. 한국은 셋 다 어긋난다.

먼저 성장 가정이다. 미국은 AI가 풍요를 키운다고 보지만, 한국의 장기 성장 전망 시나리오는 아직 밝지 않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실질성장률이 2025년 2.2%에서 2072년 0.3%로 내려간다고 본다.[2] 당장은 성장이 되살아나는 듯 보여도, 인구가 줄어드는 긴 추세에서는 풍요를 나누기 전에 성장이 먼저 식는다.

다음으로 노동이 어긋난다. 미국에서는 AI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문제다. 한국에서는 생산연령인구가 50년 만에 절반 아래로 줄어, '일자리 부족' 위에 '일손 부족'이 겹친다. 그래서 한국에는 AI를 일자리 위협이 아닌 빈 일손을 메울 해법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끝으로 세원이 어긋난다. 이 프레임워크에서 미국은 자본으로 옮겨 간 소득에 새로운 세금을 매길 수 있다고 보지만, 2026년 현재 한국은 금융투자소득세를 폐지하고 거래세로 돌아갔다. 보수도 진보도 자본을 우대해, 세원이 커지기는커녕 자본에 세금을 거둘 수단이 거듭 줄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처방을 받아 적기만 해서는 한국에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다. 같은 질문이라도 한국 토양에서는 답을 달리해야 한다. 이 어긋남이 연구의 출발점이다.

묻는 자리

이 연구는 한 비영리 투자 기관에서 출발한다. 기술 진보와 인구구조 변화가 환경과 사회와 지정학에 미치는 영향을 화두로 삼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일을 과업으로 삼은 기관이다. 그 자리에서 보면 앤트로픽의 프레임워크는 남의 나라 정책안이 아니라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AI가 자본의 시대를 연다면, 그 자본을 누가 소유하는가. 소유의 분배를 미리 설계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목표와 방법

한 줄 질문

이 연구가 답하려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AI가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하는 시대에, 자본의 소유를 미리 나누는 장치(사전분배·지분 공유)를 한국 토양에 어떻게 심을 것인가?

코어와 주장을 가른다

연구는 두 층으로 짠다. 아래층은 중립 코어다. 증거와 논리만 담는다. 정치적 색을 입히지 않는다. 같은 분석이 한쪽에서는 중립 연구로 읽히고 다른 쪽에서는 날 선 제안의 논리적 토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분석 자체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아야 한다. 위층은 주장이다. 독자에 따라 어조와 위험 수위를 갈아 끼운다. 정부에게는 연구 브리프로, 정당에게는 정책 제안으로, 기업에게는 지배구조의 시사점으로 관점을 바꾸어 제시한다.

이 문서는 아래층까지만 담는다. 위층은 다음 기착지에서 다루기로 한다.

독자 셋

코어가 떠받칠 독자는 셋이다. 먼저 비영리 투자 기관이다. 모델을 시험하고 증거를 모으며 분산 소유의 그릇을 만드는 자리다. 다음은 정부와 정당이다. 연구 브리프를 정책 제안으로 연결시킨다. 마지막은 기업이다. AI 비용이 모이는 곳이자 노동 대체가 일어나는 곳이며, 동시에 분산된 자본 소유가 깃들 수 있는 장소다.

방법

방법은 셋으로 정한다. 첫째, 정치철학, 정치경제학과 교차 프레임으로 종합한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반대 관점을 함께 세운다. 둘째, 모든 수치를 1차 출처(primary source)로 확인한다. 통계청, 국회예산정책처,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국민연금공단, 국제로봇연맹이 우선이다. 셋째, 코어와 주장을 분리한다. 코어에서는 중립을 지키고, 설득은 주장 층에 맡긴다.


3. 분석 — 여섯 마디

분석은 여섯 마디로 짠다. 다섯 마디가 도메인을 하나씩 파고, 마지막 한 마디가 그것을 묶는다. 첫 마디가 척추다. AI의 급격한 발달이 던지는 충격이 왜 한국과 미국에서 다른지 논증한다. 둘째와 셋째 마디는 그 충격에 맞설 장치를 살핀다 — 자본계좌라는 그릇과 국민연금이라는 엔진이다. 넷째 마디는 과세의 길이 왜 막혔는지를 따진다. 다섯째 마디는 가치가 자본으로 빠져나가는 결절점, 곧 기업 안을 들여다본다. 여섯째 마디가 다섯을 종합한다.

3-1. 인구구조 × AI — 상충하는 두 충격

미국이 맞는 충격은 하나다. 일자리가 사라진다. 한국이 맞는 충격은 둘이다. 그리고 둘은 서로 반대로 당긴다. AI가 노동을 밀어내고, 인구구조가 노동을 거둬간다.

인구구조부터 보자. 통계청 장래인구추계(2022~2072, 중위)[3]는 노동이 사그라드는 추세를 또렷이 보여 준다. 생산연령인구는 2022년 3,674만에서 2072년 1,658만으로 줄어든다. 50년 만에 절반 아래, 45.1% 수준이다. 줄어드는 속도에는 가속이 붙는다. 2020년대에는 해마다 32만씩 빠지고, 2030년대에는 해마다 50만씩 빠진다. 베이비붐 세대가 고령층으로 넘어가는 까닭이다. 경제활동의 한복판인 25~49세는 1,860만에서 764만으로 떨어진다. 역시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부양의 부담은 뒤집힌다. 총부양비는 2022년 40.6에서 2058년에 100을 넘고 2072년에는 118.5에 닿는다. OECD 최저에서 최고로 간다. 부담의 정체가 중요하다. 2072년 총부양비 118.5 가운데 노년이 104.2다. 부양 부담의 거의 전부가 노인이다. 고령인구는 2022년 898만에서 2025년에 1,000만을 넘는다. 그 비중은 2025년 20%, 2036년 30%, 2050년 40%를 차례로 넘는다. 65세 이상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초고령사회는 2024년 12월에 이미 현실이 됐다.

AI 쪽은 정반대에서 노동을 밀어낸다. 국제로봇연맹의 『World Robotics 2025』[4]를 보면, 한국의 로봇 밀도는 세계 1위다. 제조업 노동자 1만 명당 1,220대다. 2위 싱가포르 818대, 3위 독일 449대와의 격차가 크다. 2019년 이후로 해마다 평균 7%씩 늘었다. 동력은 전자 산업과 자동차 산업이다. 두 산업이 산업용 로봇의 가장 큰 고객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속도를 인구 감소에 대한 대응으로 인식한다. 로봇과 AI로 빈 일손을 메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틀림이 생긴다. 미국에서 AI는 문제다. 일자리를 없앤다. 한국에서 AI는 해법이라 불린다. 사라지는 일손을 메운다. 같은 기술이 한쪽에서는 위협이고 한쪽에서는 처방이다.

두 힘이 반대로 당기니 상쇄처럼 보인다. AI가 노동을 밀어내고 인구구조가 노동을 거두어 가니, 총량에서는 빈자리가 메워지는 듯한 착시가 생긴다. 그래서 "노동이 모자란 나라에 분배가 왜 급하냐"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함정이다. 두 힘은 같은 사람을 치지 않는다. AI는 청년을 친다. 신입과 사무와 정형 업무부터 사라진다. 사다리의 아랫칸이 무너진다. 일손 부족은 다른 데서 터진다. 돌봄과 현장과 지방이다. 사람이 모자란 자리와 사람이 밀려난 자리는 겹치지 않는다. 한쪽에는 빈자리, 한쪽에는 밀려난 사람. 총량의 셈법이 0에 가까워도 분포는 어긋난다. 평균이 이 어긋남을 덮는다. 총량 상쇄만 보고 분배를 미루면, 어긋남의 비용은 청년과 지방이 지게 된다.

이 분석에서 고려하지 않은 변수가 하나 있다. 바로 이민이다. 일손 부족의 가장 빠른 보충 파이프라인은 이민이다. 앤트로픽 프레임워크는 이민을 비워 두고, 한국에서의 논의도 대개 이 자리를 비워 둔다. 그러나 이 변수는 실재한다. 통계청 추계도 국제순이동을 2030년대에 연 6만 명 중반대로 가정한다. 직전 추계의 연 4만보다 늘려 잡았다. 이민이 일손을 메우면 "AI가 해법"이라는 프레임의 무게가 줄어든다. 둘은 경쟁하는 처방이다. 다만 이민은 규모와 속도와 사회통합에서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일단 코어에서는 이를 중립 변수로만 적어 둔다.

아무튼 그래서 역설에 도달한다. 노동이 모자란 나라인데 자본 소유의 분배가 더 급하다. 세 가닥이 얽힌다. 첫째, 재원이 막힌다. 부양 부담은 노년 104.2로 거의 다 노인에게 쏠린다. 그 부담을 질 노동은 얇아지고 AI의 일자리 박탈 압력은 커진다. 얇아질대로 얇아진 노동에 노년 부양을 더 매길 수 있는 길은 매우 제한적이다. 둘째, 목적이 다르다. 미국에서 자본 계좌는 잃은 임금을 메운다. 한국에서는 다르다. 줄어드는 현역에게 부양 부담을 떠받칠 자본 소득원을 쥐여 주는 일이다. 임금 보전이 아니라, 노동소득 하나로 노년을 떠받치다 무너지지 않도록 두 번째 기둥을 세우는 일이다. 셋째, 복리의 역설이다. 한국은 신생아 급감을 실시간 목격 중이다. 출생 코호트에 종잣돈을 심어 복리로 키우는 모델은 한국에서는 너무 늦다. 살아 있는 세대부터 채워야 한다. 청년과 현직 노동자가 먼저다.

이 척추가 다음 마디로 이어진다. 처방을 담을 그릇은 둘째 마디에서, 그 그릇을 돌릴 엔진은 셋째 마디에서 본다.

3-2. 사전분배형 자본계좌 — 새는 그릇

미국 모델의 유전자는 넷이다. 보편적이고, 정부가 종잣돈을 심으며, 복리로 불어나는 자산이고, 본인이 지분을 소유한다. 한국 제도는 저마다 일부만 가졌다. 넷을 한 그릇에 담은 제도가 없다.

한국에는 세 제도가 있다. 첫째는 디딤씨앗통장이다. 취약계층 아동의 자립 종잣돈으로 2007년에 시작했다. 2025년에 매칭을 1:2로 올렸다.[5] 본인이 월 5만까지 저축하면 정부가 두 배인 월 10만을 얹어, 합산 월 최대 15만이 된다. 그러나 세 가지가 걸린다. 취약계층만 받으니 보편적이지 않다. 저축을 해야 매칭을 받으니 가장 가난한 아이가 누락된다. 정부 매칭분을 국공채로 굴리니 지분이 아니다.

둘째는 청년도약계좌다. 2023년 6월에 시작했다가 2026년 6월에 청년미래적금으로 갈아탄다.[6] 도약계좌는 19~34세, 총급여 7,500만 이하의 청년이 월 70만씩 5년을 부으면 원금 4,200만에 정부기여금과 비과세를 얹어 약 5,000만을 만드는 적금이었다. 호응이 컸다. 2025년 2월에 누적 166만 명이 가입했다. 그러나 월 70만은 큰돈이라 여윳돈 있는 청년에게 유리했고, 평생 복리가 아니라 5년 적금이었다. 그리고 끝났다. 새 정부가 판매를 종료하고 청년미래적금으로 옮긴다. 새 상품은 월 50만에 3년이다. 기여금 비율은 올렸으나 기간은 줄였다.

셋째는 부모급여와 아동수당이다. 부모급여는 0세 월 100만, 1세 월 50만으로 소득과 무관한 보편 급여다. 아동수당은 8세 미만 월 10만으로 역시 보편이다.[7] 그러나 둘 다 현금이전이다. 소유도 복리도 없다.

진단을 종합하면단 효과가 새는 지점이 둘이다. 첫째, 보편성과 자산형성이 따로 논다. 보편성은 현금이전에 있고, 자산형성은 선별계좌와 적금에 있다. 미국 모델은 둘을 한 그릇에 담았는데 한국은 갈라 두었다. 둘째, 목돈은 있어도 흐름이 없다. 한새의 세 가지 제도의 공통 틀은 목돈 마련이다. 디딤씨앗은 자립 종잣돈이고, 적금은 주택과 결혼의 목돈이다. 다 일회성이다. 한 번 쓰면 끝난다. 그런데 첫 마디에서 말한 처방은 평생 가는 두 번째 기둥, 곧 부양 부담을 떠받칠 자본 소득의 흐름이다. 목돈은 흐름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 제도는 자산형성에는 닿아도 사전분배에는 닿지 못한다.

가장 약한 고리는 설계가 아니라 정치의 연속성이다. 청년희망적금은 문재인 정부의 2년 상품이었다. 청년도약계좌는 윤석열 정부의 5년 상품이었다. 청년미래적금은 새 정부의 3년 상품이다. 세 정권, 세 상품. 이름도 기간도 매번 갈린다. 복리는 시간을 먹고 크는데, 그 시간을 정치가 보장하지 않는다. 5년이 3년으로 짧아진 것은 후퇴다. 물론 윤정권 조기종식으로 실질 효과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복리의 시간을 줄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한국은 자산형성 적금을 반복할 뿐, 자본 소유의 분배로 건너가지 못한다.

그래서 길을 새로 깔지 않고 이미 깔린 길을 잇는다. 부모급여의 한 조각을 정부 출연 복리·지분 계좌로 돌리면 보편성 위에서 네 유전자를 한 번에 채운다. 디딤씨앗의 종잣돈을 저축과 분리해 무조건 심고, 가난할수록 더 심는 누진 출연으로 바꾼다. 국공채와 은행적금을 국내 성장·기술 자본으로 바꿔 지분으로 충전한다. 기본값을 일회성 인출이 아니라 지분 보유와 배당에 두어 목돈이 아니라 흐름으로 설계한다. 그리고 출생 코호트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대부터 채운다.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긴장이 있다. 사전분배는 미래의 흐름을 키우지만, 청년의 오늘은 생활비가 급하다. 자산-later와 현금-now가 충돌한다. 복리는 긴 시간을 먹는데, 당장의 결핍은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이 긴장은 소득지원과 짝을 지어야 풀린다. 자본계좌 하나로 다 메우려 들면 둘 다 놓친다.

3-3. 국민연금·지분 공유 — 이미 지어진 기계

프레임워크가 3단계 장치로 든 국부펀드와 지분 공유가 한국에는 이미 반쯤 지어져 있다. 다만 그 기계는 인구에 저당 잡혀 있다.

국민연금은 이름만 연금인 국부펀드다. 적립금이 2025년 말에 1,458조였고, 2026년 1월에 1,540조를 넘었다. 국내 증시 최대 기관투자자다. 삼성전자 지분 7.8%, SK하이닉스 8.1%를 쥔 대형주 최대 주주다. 국내주식만 320조로 적립금의 21%다. 2025년에는 231.6조를 벌었다. 기금 설치 이래 최고 수익률인 18.82%다. 한 해 수익이 연금 지급액 49.7조의 4.7배다.[8] 그러나 그 돈은 시민에게 한 푼도 가지 않는다. 전액 고갈을 늦추는 데 들어간다.

함정은 배당이 인구에 저당 잡힌 데 있다. 현행 보험료율 9%와 소득대체율 40%로는 2041년에 적자로 돌아서고 2055년 전후에 바닥난다. 2025년 3월 개혁이 시간을 샀다. 보험료율을 2033년까지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43%로 높이고, 국가지급보장을 법에 박았다. 그래도 고갈은 2064년으로 9년 미뤄질 뿐이다. 수익률을 5.5%로 끌어올려야 2071년까지 간다.[9] 뒤집어 읽으면 이렇다. 초과수익은 이미 인구 부채의 상환에 선예약됐다. 자본 재분배가 가장 절실한 나라에서 최대 자본 풀이 부채에 묶여 있다.

막 태어난 지분 공유 장치도 있다. 국민성장펀드다. 정부가 주도해 5년 150조를 반도체·AI·바이오·이차전지·로봇·방산 등 12개 첨단전략산업에 댄다. AI 30조, 반도체 20.9조가 가장 큰 몫이다. 2025년 12월 10일에 출범했고 2026년에 30조를 집행한다.[10] 설계의 이름은 좋다. 국민이 투자자로 참여해 성장의 과실을 나눈다. 정부가 위험을 먼저 지고 세제 혜택도 얹는다. 그러나 완벽한 제도는 없다. 이 제도에도 결함이 보인다. 국민참여형은 본인이 돈을 넣는 공모펀드다. 한도는 5년 2억이다. 2026년 5~6월에 실제로 팔렸다. 국민 모집 6천억에 재정 1,200억을 더해 7,200억이었다. 여윳돈 있는 사람만 과실을 나눈다. 사전분배와 정반대 방향이다.

그래서 기계를 다시 겨눈다. 첫째, 국민성장펀드에 출연형 갈래를 짓는다. 자본 없는 청년에게 정부가 무상으로 지분 구좌를 배정한다. 둘째 마디의 자본계좌가 채울 지분의 공급원이 여기다. 자기 돈을 넣는 공모형 옆에, 안 넣어도 받는 출연형을 따로 세운다. 둘째, 연금 호황분을 시민에게 배당할 길을 미리 설계한다. 지금은 뗄 잉여가 없다. 고갈 방어가 먼저다. 그러나 고갈이 2071년까지 밀리고 인구 압력이 풀리면 초과수익의 일부를 시민 배당으로 돌릴 여지가 생긴다. 알래스카 영구기금이 모델이다. 지금 쓰는 게 아니라 길만 예약한다.

지분 공유에는 또 한 갈래가 있다. 나라가 거시에서 거두는 길 옆에, 기업이 안에서 거두는 길이다. 우리사주와 노동이사제와 종업원 신탁이 그 길이다. 거시와 층이 다르므로 다섯째 마디에서 따로 판다.

여기에도 긴장이 있다. 첫째, 연금사회주의다. 국가가 대형주 최대 주주다. 지분을 더 키우면 국가가 시장의 지배 주주가 된다. 지배구조와 정치중립이 걸린다. 둘째, 집중 위험의 가계 전가다. 자본계좌를 반도체 지분으로 채우면 청년의 노후가 반도체 사이클에 묶인다. 여기에 새 딜레마가 겹친다. 2025~26년 증시 랠리로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이 목표 14.4%와 허용치 19.9%를 넘어 24.5%까지 올랐다. 팔자니 시장 충격이고 들자니 쏠림이다. 같은 함정을 가계 계좌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셋째, 고갈 딜레마다. 최대 재원이 이미 인구에 저당 잡혔다. 2025년의 초과수익조차 고갈 지연에 선예약됐다. 이것이 한국판 전체의 근본 제약이다. 헌 그릇을 헐어 새 분배에 쓸 수 없다. 그러니 새 그릇을 따로 지어야 한다.

3-4. 조세 — 자본에 매기지 못하는 나라

프레임워크의 논리는 단순하다. 노동의 실효세율이 자본보다 높다. 소득이 노동에서 자본으로 흘러가면 세제가 거두는 몫이 준다. 그래서 새 자본 세원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이 격차는 더 날카롭게 들어맞는다.

한국의 노동소득은 6~45%의 누진세에 4대보험까지 문다. 반면 상장주식 양도차익은 대체로 무과세다. 종목당 50억 또는 일정 지분 비율을 넘는 대주주만 양도세를 낸다. 나머지에게는 0.2%짜리 증권거래세가 전부다. 그런데 한국은 이 격차를 좁히기는커녕 벌렸다. 자본이득 과세를 거듭 접었다. 금융투자소득세는 연 5천만 초과분에 20~25%를 매기는 세금이었는데 2024년 12월에 폐지했다. 그 김에 거래세를 도로 올려, 금투세를 전제로 내렸던 세율을 백지화하고 2026년 0.20%로 환원했다. 소득 과세를 접고 거래 과세로 돌아갔다. 대주주 기준을 10억으로 강화하려다 시장과 정치권의 반발로 무산됐고, 50억을 유지했다. 가상자산 과세도 2025년에서 2027년으로 미뤘다.[11]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보 성향의 새 정부조차 금투세를 되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코스피 5000·자본시장 활성화'를 내걸고 고배당 분리과세를 새로 만들었다. 배당소득을 14~45%의 종합과세에서 빼내 최고 30%로 분리해 준다. 자본소득을 더 우대하는 길이다. 보수도 진보도 같은 자리에 섰다. 2024년부터 2026년까지, 자본 과세의 모든 수가 한 방향으로 갔다. 우대다. '자본에 못 매긴다'는 것은 한 정권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다.

재정은 정반대를 가리킨다. 돈은 어느 때보다 급하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장기재정전망(2025~2072)을 보면, 국가채무는 2025년 1,270조에서 2072년 7,303조로 늘어난다. GDP 대비로는 47.8%에서 173.0%다. 47년 만에 5.7배다. 관리재정 적자는 2025년 85조에서 2030년 99조, 2060년 227조, 2072년 271조로 불어난다. 동력은 인구와 저성장이다. 실질성장률이 2.2%에서 0.3%로 떨어진다. 기획재정부도 같은 그림을 그렸다. 제3차 장기재정전망(2025.9)은 2065년 국가채무 비율을 기준 156%, 최대 173%로 봤다.[12] 두 기관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 돈이 가장 급한 나라가 자본세를 내려놨다. 이 모순이 넷째 마디의 핵심이다.

왜 막히는가. 표밭이 두텁다. 상장주식 개인 투자자가 1,423만, 가상자산 이용자가 1,077만이다.[13] 자본이득 과세는 곧장 표를 건드린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불안에 자본 이동성이 겹쳐 증시와 환율로 즉각 체감된다. 생산단계 자동화에 대한 과세는 양날이다. 로봇·AI 과세는 반도체·전자 같은 수출 주력을 겨눈다. AI 부과금의 한국 짝은 아직 없다. 로봇세 논의는 2017년 자동화 세액공제 축소에 그쳤다.

결론은 넷째 마디를 셋째 마디에 맞물린다. 한국은 자본에 과세는 못 해도 소유는 할 수 있다. 과세는 표를 잃지만, 국부펀드식 지분 취득은 '함께 올라탄다'는 이름으로 저항이 덜하다. 보수도 진보도 자본 과세에 실패했으니, AI 자본 이득을 거두는 길은 과세가 아니라 소유로 난다. '과세보다 소유'는 이념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산수다. 다만 단서를 하나 단다. 빚이 GDP의 173%로 치닫는 압력은 언젠가 자본 세원을 다시 부른다. 그러니 새 세원의 길을 죽이지 말고 살려 둔다. 순서가 소유 먼저일 뿐이다.

3-5. 기업과 AI 자본 — 가치가 빠지는 결절점

AI가 만든 가치가 자본으로 바뀌는 곳이 기업이다. 그 결절점을 들여다본다. 척추는 한 문장이다. 비용은 노동이 치르고, 이득은 자본이 가져간다 — 같은 기업 안에서.

비용을 누가 내는가. 토큰과 연산과 SaaS의 값을 치르는 주체는 기업이다. 멘로벤처스 집계로 2025년 파운데이션 모델 API 지출은 125억 달러, 생성형 AI 인프라층 전체는 180억 달러다. 기업의 LLM 지출은 2024년 말 35억에서 2025년 84억으로 반년 만에 두 배가 됐다.[14] 추론이 학습을 넘어섰다. 한 번 사는 게 아니라 날마다 토큰을 태우는 단계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그 큰손은 누구인가. 한국에서 AI를 자본으로 굴리는 기업은 수출 주력이다. 통계청 기업활동조사를 패널로 분석한 연구는 AI 도입이 매출과 부가가치를 키우고 수출을 늘린다고 본다.[15] AI를 가장 깊이 들이는 곳이 가장 크게 거두는 곳이고, 그곳이 수출 대기업이다. 노동 대체도 기업에서 일어난다. 같은 기업이 AI를 들이고, 그 자리에서 사람의 일이 밀린다. 비용과 이득과 대체가 한 지붕 아래 모인다.

한 사람을 보자. 그는 회사에서 일한다. 회사가 AI를 도입한다. 그의 일 일부가 AI로 넘어간다. 같은 사람이 그 AI의 값을 댄다. 토큰과 연산의 비용은 회사 살림에서 나가고, 회사 살림은 노동이 함께 만든 것이다. 그러니 그는 자기를 밀어내는 도구의 값을 자기 노동으로 함께 치르는 셈이다. 그렇게 치른 이득은 주주에게 간다. 비용은 노동이 지고, 이득은 자본이 가져간다. 같은 기업 안에서 기여와 소유의 고리가 끊긴다. 반론도 있다. 주주는 위험 자본을 댔고 AI 투자의 위험을 진다. 이득은 그 위험의 값이라는 시각이다.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노동이 비용을 함께 지면서도 소유에서 빠지는 구조 자체는 그 반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위험을 누가 졌는가와 별개로, 기여한 자가 소유에서 빠진다는 사실은 남는다.

가치가 빠져나가기 전에 거두는 길은 둘이다. 밖에서 과세로, 안에서 소유로. 밖의 과세는 AI 부과금과 로봇세로 자본 이득의 일부를 공적으로 거두는 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비용지불자가 곧 수출 주력이라, 생산단계 자동화 과세는 반도체·전자 수출을 정면으로 겨눈다. 넷째 마디가 짚은 양날의 검이다. 안의 소유는 종업원이 회사 지분을 갖는 길이다. 종업원 신탁, 우리사주, 노동이사제가 그것이다. 과세가 막힌 자리의 우회로다. 셋째 마디와 갈라서는 지점이 여기다. 나라가 거시에서 거두는 길과 기업이 안에서 거두는 길은 층이 다르다.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이 받친다.

한국의 기업 단위 소유는 현황과 빈자리가 또렷하다. 우리사주제는 종업원이 자기 회사 지분을 사는 제도지만 참여가 얕다. 상장기업에 쏠리고, 의결권보다 시세차익에 가깝다. 소유의 형식은 있되 권력의 실질이 옅다. 노동이사제는 2022년 공공기관에 들어왔다. 소유가 아니라 발언권이고, 민간에는 없다. 공동체주의와 맞닿아 있되 아직 상징에 가깝다. 종업원 신탁(EOT)은 회사 지분을 신탁에 넣어 종업원이 집단으로 소유하는 길이다. 영국과 미국이 법제로 가졌으나 한국에는 그 법제가 없다. 길 자체가 제도로 닫혀 있다. 그 공백을 사적 결단이 메운 사례가 있다. 한 중소기업은 관련 법제가 없는 자리에서 공동근로복지기금을 세워, 임직원이 지배구조와 의사결정에 이어서 참여할 기반을 만들었다. 비영리 임의단체를 함께 세워 회사가 담지 못하는 '공동체로서의 일'을 맡겼다. 제도가 없으면 대주주 한 사람의 의지로만 길이 난다. 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면 길도 닫힌다. 그것이 빈자리의 크기다. 제도의 부재가 분배를 우연에 맡긴다.

소유를 나눈다고 쏠림이 풀리지는 않는다. 두 겹의 위험이 있다. 거시에서는 분배가 쏠린다. AI 가치의 포착은 대기업과 수출 주력에 쏠린다. 통계청 통계개발원 집계로 AI 도입률은 대기업 9.2%, 중소기업 2.9%다. 세 배가 넘는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 도입률을 5.3%로, 한 자릿수로 본다.[16] 종업원 소유도 우리사주가 대기업에 쏠린다. 둘이 겹치면 노동 이중구조를 되레 굳힌다. 대기업 정규직은 주주가 되고, 중소·비정규·플랫폼 노동은 그 바깥에 남는다. 노동자 단위의 생성형 AI 활용 격차는 최근 좁혀진다. 대기업 66.5%, 중소 52.7%다.[17] 그러나 기업이 AI를 자본으로 포착하는 단계로 가면 격차가 다시 벌어진다. 쓰는 일과 거두는 일은 다르다. 미시에서는 권력이 쏠린다. 소유를 나눠도 권력은 다시 한곳으로 모인다. 참여는 평소에 식고 위기 때만 잠깐 살아난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닫힌 동호회가 되고, 끝내 유능해 보이는 한 사람에게 결정이 몰린다. 그러면 소유는 장부에만 남고 참여는 껍데기가 된다. 지분을 고르게 나눠도 의결의 실질이 한쪽으로 쏠리면 이름만 공동소유다.

그래서 묻는다. 중소·비정규·플랫폼 노동은 어디에 있는가. 기업 단위 소유는 울타리 안의 사람만 거둔다. 울타리 밖은 다섯째 마디가 풀지 못한다. 그 자리는 셋째 마디의 공적 장치와 둘째 마디의 자본계좌가 맡아야 한다. 기업 단위 소유는 한 조각이다. 혼자서는 이중구조를 되레 키울 수 있다.


4. 종합 — 공동체주의의 눈으로

마지막 마디가 다섯을 묶는다. 무엇을, 어떤 순서로 할지를 정하고, 비영리 기관의 자리를 짚는다.

다섯 마디가 한 곳을 가리킨다

두 충격이 비틀린다. AI가 노동을 밀고, 인구가 일손을 거둔다. 총량의 상쇄가 분포의 어긋남을 가린다. 그래서 사전분배는 잃은 임금의 보전이 아니라, 부양 부담을 질 자본 소득원이다. 두 번째 기둥이다. 그릇은 새고 엔진은 저당 잡혔다. 자본계좌는 정권마다 상품으로 갈려 흐름에 머물고, 국민연금은 거대한 준-국부펀드지만 2025년의 초과수익 231.6조조차 고갈 지연에 선예약됐다. 과세는 막혔고 기업 안에서 고리가 끊겼다. 보수도 진보도 자본을 우대했고, 같은 기업 안에서 비용은 노동이 치르고 이득은 자본이 가져간다.

결론은 한 줄로 모인다. 한국은 자본에 과세는 못 해도 소유는 할 수 있다. 단 최대 자본 풀은 이미 인구에 저당 잡혔다.

왜 소유인가

끊어진 일-소득의 고리를 잇는 답은 둘이다. 재분배(현금)냐 사전분배(지분)냐. 현금 이전은 수급자를 만든다. 지분은 공동 소유자를 만든다. 내가 지지하는 공동체주의의 관점에서는 후자가 기여와 소유의 끊긴 끈을 다시 잇는다. 이 읽기에서 소유의 민주화는 분배가 아니라 권력의 자리를 옮기는 일이다. 한 세기의 정치경제가 같은 곳을 가리킨다. 폴라니는 시장이 사회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보았고, 슈마허는 거대함이 사람을 부품으로 떨어뜨린 것을 보았으며, 아렌트는 권력이 함께 가질 때만 산다고 했고, 샌델은 공동선을 말했다.

정치경제학의 계보도 같은 자리를 받친다. 사전분배(predistribution)라는 말 자체가 정치경제학에서 왔다. 재분배가 시장이 끝난 뒤 결과를 손보는 일이라면, 사전분배는 시장이 시작되기 전에 자산과 기회의 분포를 바꾸는 일이다. 뿌리는 더 깊다. 미드와 롤스는 '재산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를 말했다. 복지국가가 소득을 사후에 이전하는 데 그친다면, 재산소유 민주주의는 생산자산의 소유 자체를 미리 널리 흩뿌린다. 롤스는 복지국가 자본주의보다 이 길을 앞에 두었다. 피케티는 다른 각도에서 같은 곳을 가리킨다. 자본의 수익률이 성장률을 웃돌면(r>g) 자본의 몫이 꾸준히 커진다. 소득의 흐름만 손봐서는 그 격차를 따라잡지 못한다. 자본의 소유라는 저량(stock) 자체를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사전분배는 이 진단에 대한 한 응답이다.[18]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반대도 또렷하다. 재분배가 더 빠르고 보편적이다. 지분은 시차가 길고 시장 위험을 탄다. 당장 가난한 이에게는 현금이 낫다. 소유는 위험을 가계로 떠넘긴다. 자본계좌를 주식으로 채우면 청년의 노후가 사이클에 묶인다. 국가 소유는 연금사회주의로 흐른다. 국가가 시장의 지배 주주가 된다. 판정은 이 긴장을 안고 간다. 소유로 기운다고 재분배와 과세를 버리지 않는다. 버리고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다.

한국 토양 통과 시험

미국 틀은 한국에 그대로 이식할 수 없다. 입력값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을 가르는 세 제약 — 인구 절벽, 연금 저당, 소유 집중과 노동 이중구조 — 에 처방을 하나씩 통과시켜보자. 판정은 여섯 가지다.

보편 자본계좌는 통과한다. 세 제약을 모두 넘어선다. 줄어드는 현역에게 부양 부담을 떠받칠 두 번째 기둥을 세우니 인구 절벽에 답하고, 국민연금과 별개로 짓는 새 그릇이니 연금 저당을 비켜 가며, 모두에게 보편으로 깔면 대기업·정규직만 거두는 쏠림을 굳히지 않는다.

공적 지분(국민성장펀드)은 변형해야 통과한다. 지금의 국민참여형은 본인이 돈을 넣는 공모펀드라, 여윳돈 있는 사람만 과실을 가져간다. 이대로면 탈락이다. 돈을 넣지 않아도 청년에게 지분을 배정하는 출연형으로 바꿔야 사전분배의 취지를 살릴 수 있다.

연금 시민배당은 지금은 탈락한다. 연금이 인구에 저당 잡혀 떼어 줄 잉여가 없는 까닭이다. 고갈 방어가 먼저다. 다만 고갈이 뒤로 밀리고 인구 압력이 풀리는 날을 위해, 배당의 길만 미리 예약해 둔다.

자본 과세도 지금은 탈락한다. 자본에 매기는 일은 표를 잃는다. 보수도 진보도 거듭 자본을 우대해 왔다. 이것은 '정치의 산수'다. 그러나 국가채무가 GDP의 173%로 치닫는 압력이 언젠가 자본 세원을 다시 부른다. 그러니 제도의 길은 죽이지 않고 살려 둔다.

기업 단위 종업원 소유는 부분만 통과한다. 분산 소유를 넓히는 데는 보탬이 된다. 그러나 그 혜택이 대기업과 정규직에 쏠리고, 소유를 나눠도 권력이 한 곳으로 다시 모이는 위험이 걸린다. 중소·비정규·플랫폼 노동까지 닿는 설계로 바꿔야 온전히 통과한다.

AI 경제 측정은 통과한다. 한국은 로봇이 가장 빽빽한 나라다.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실험실이다. 무엇이 얼마나 대체되고 어디로 가치가 흐르는지 재는 일이, 나머지 모든 처방의 토대가 된다.

우선순위와 순서

앞의 통과 시험이 그대로 실행 순서가 된다. 처방을 세 구간으로 나눈다. 나누는 잣대는 셋이다. 지금 해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가, 비용이 적게 드는가, 효과가 언제 나타나는가.

첫째, 지금 바로 할 일. 이미 깔린 길을 잇는 일이라 후회가 없고 비용도 적다. 부모급여의 한 조각을 자산 계좌로 돌린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도약을 얻는다. 디딤씨앗 종잣돈은 저축과 떼어 내, 저축하지 않아도 무조건 심는다. 국민성장펀드에는 출연형 갈래를 두어 청년에게 무상으로 지분을 배정한다. 앞의 두 계좌를 채울 지분이 여기서 나온다.

둘째, 제도를 다듬어 갈 일. 분산 소유를 키우는 일이라 시간과 입법이 필요하다. 기업 단위 분산 소유를 넓힌다. 우리사주를 확대하고, 노동이사제를 민간으로 넓히며, 종업원 신탁의 법제를 새로 연다. 단 그 설계는 양심의 시험 — 분배의 쏠림, 권력의 쏠림, 위험의 전가 — 을 통과해야 한다. 한국판 AI 경제 지표도 세운다. 로봇이 가장 빽빽한 나라라는 이점을 실험실로 쓴다.

셋째, 지금은 미루되 길은 닦아 둘 일. 효과를 보려면 조건이 무르익어야 하는 일이다. 하나는 연금과 국부펀드의 호황분을 시민에게 배당하는 길이다. 지금은 떼어 줄 잉여가 없으니 설계만 해 두고 예약한다. 다른 하나는 새 자본 세원이다. 국가채무가 GDP의 173%로 치닫는 압력이 언젠가 이 세원을 다시 부른다. 두 가지 모두 길은 살려 두되, 순서에서는 소유가 먼저다.

양심 — 모든 처방을 가로지르는 시험

이 시험은 우선순위 옆에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처방에 들이댄다. 세 물음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 분배가 쏠리는가. 처방이 대기업과 정규직에 쏠리는가. AI 가치 포착도 종업원 소유도 그쪽으로 쏠린다. 보편형이 아니면 노동 이중구조를 되레 굳힌다. 둘째, 권력이 쏠리는가. 소유를 나눠도 권력이 다시 한곳으로 모이지 않는가. 참여는 평소에 식고 위기 때만 살아난다. 안으로 갈수록 닫힌 동호회가 되고 한 사람에게 결정이 몰린다. 장부의 소유와 실질의 참여는 다르다. 셋째, 위험을 전가하는가. 처방이 시장 위험을 가계로 떠넘기는가. 분산과 보편이 답이다.

울타리 밖이 남는다. 기업 단위 소유는 울타리 안의 사람만 거둔다. 중소·비정규·플랫폼은 보편 계좌와 공적 장치가 맡아야 한다. 분산 소유로 국가의 집중을 풀되, 보편으로 울타리 밖을 함께 거둔다. 두 손이 짐을 나눠 든다.

비영리 투자 기관의 자리

국가도 시장도 못 하는 자리가 있다. 첫째, 모델을 증명한다. 한 지역과 코호트에 보편형 청년 자본계좌를 지분으로 시범 운영한다. 둘째, 분산 소유의 그릇을 짓는다. 국가를 키우지 않고 소유를 넓힌다. 시민 거버넌스를 명시한 지역·종업원 공동소유 펀드다. 셋째, 독립된 증거를 만든다. AI의 노동 영향을 독립적으로 측정한다. 한 기업의 데이터가 못 보는 그림이다. 넷째, 독자 틀을 만든다. 미국 틀은 개막 제안일 뿐이다. 한국은 자기 틀이 필요하다. 이 연구가 그 초안이다.

묶는 말

가장 단단한 제약을 다시 적는다. 자본 재분배가 가장 절실한 나라가, 최대 자본 풀을 이미 인구에 저당 잡혔다. 헌 그릇을 헐어 새 분배에 쓸 수 없다. 그러니 새 그릇 — 공적 지분, 비영리 자본, 협동조합 — 을 따로 짓는다. 미국 틀의 "사람은 일자리보다 크다"를 한 걸음 더 끌고 간다. 끊어진 고리의 답은 수표를 받는 고객이 아니라 몫을 가진 주인을 세우는 데까지 간다. 다만 그 주인됨이 장부에 그치면 껍데기다. 소유가 권력의 실질로 가야 한다. 그것이 이 연구가 마지막에 남기는 시험이다.


5. 어디까지 왔나 — 다음 기착지

지금 선 자리

중립 코어가 섰다. 분석 다섯 마디와 종합 한 마디를 모두 채웠고, 모든 수치를 1차 출처로 확인했다. 출발 텍스트를 소화한 원천 노트와 여섯 마디의 뼈대를 정한 연구계획도 갖췄다. 이 문서가 묶은 것이 바로 그 코어다.

각 마디의 상태는 이렇다. 인구구조(31), 자본계좌(32), 조세(34)는 수치 검증과 논점 강화를 마친 단계다. 국민연금(33)은 기업 단위 소유를 다섯째 마디로 넘기고 포인터로 줄인 단계다. 기업과 AI 자본(36)은 새로 세운 마디다. 비용지불자, 과세의 양날, 종업원 소유, 두 겹의 양심을 한데 모았다. 공동체주의 종합(35)은 다섯을 묶은 capstone이다. 적합성 판정, 우선순위, 양심의 시험, 비영리의 자리를 담았다.

다음 기착지

다음은 주장 층이다. 같은 코어를 독자별로 갈아 끼운다. 정부에게는 연구 브리프로, 정당에게는 정책 제안으로, 기업에게는 지배구조의 시사점으로 어조와 위험 수위를 조절한다. 코어가 중립으로 버티고, 주장이 그 위에서 날을 세운다. 이 문서는 그 갈림 직전의 마일스톤이다. 여기까지가 증거와 논리의 자리이고, 여기부터가 설득의 자리다.


6. 출처 일람

수치와 인용은 아래 1차 출처를 따른다.

출발 텍스트

  • Anthropic, Economic Policy Framework, 2026.6 (원문 PDF). 배경 인용: Korinek & Stiglitz(2026), Korinek & Lockwood(2025), Brynjolfsson et al(2025).

인구·로봇 (3-1)

  •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2022~2072년」(2023.12, 중위) — 생산연령인구, 총부양비, 노년부양비(104.2), 연령구조, 고령화 속도.
  • 통계청 브리핑(2023.12.14) — 25~49세 1,860만→764만, 국제순이동 연 6만 명 중반대 가정.
  • IFR, World Robotics 2025(2026.4) — 로봇 밀도 1,220대(세계 1위), 2019년 이후 연 7% 증가.

자본계좌 (3-2)

  • 아동권리보장원, 디딤씨앗통장(아동발달지원계좌) 안내(2026) — 1:2 매칭, 본인 5만/매칭 10만.
  • 금융위원회·서민금융진흥원 — 청년도약계좌 및 기여금 확대(2025.1), 청년미래적금 추진(2026.6 출시 예정).
  • 보건복지부 — 부모급여·아동수당(2026).

국민연금·국부펀드 (3-3)

  •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2025년 기금운용 실적(2026.2) — 적립금 1,458조, 수익률 18.82%, 수익금 231.6조.
  • 보건복지부·국민연금공단, 국민연금법 개정(2025.3.20) — 보험료율 9→13%, 소득대체율 41.5→43%, 고갈 2055→2064(수익률 5.5% 시 2071).
  • 금융위원회 — 국민성장펀드 운용방안(2025.9)·출범(2025.12)·국민참여성장펀드 판매(2026.5).
  • DART 대량보유 공시·리더스인덱스(2026.4) — 국민연금 삼성전자 7.8%·SK하이닉스 8.1%.

조세·재정 (3-4)

  • 기획재정부 — 소득세법 개정(금투세 폐지, 2024.12); 2025·2026 세제개편(증권거래세 0.20% 환원, 대주주 50억 유지, 고배당 분리과세 신설).
  • 국회예산정책처, 「2025~2072년 NABO 장기재정전망」(2025.2) — 국가채무 1,270→7,303조(GDP 47.8→173.0%), 관리재정 적자 2030년 99조→2060년 227조.
  • 기획재정부, 제3차 장기재정전망(2025~2065, 2025.9) — 2065년 채무비율 기준 156%·최대 173%.
  • 자본시장연구원(2025) — 상장주식 투자자 1,423만(2024년 말), 가상자산 이용자 1,077만(2025 상반기).

기업·AI 자본 (3-5)

  • Menlo Ventures, "2025: The State of Generative AI in the Enterprise"(2025) — 파운데이션 모델 API 지출 125억 달러, 인프라층 180억 달러, 기업 LLM 지출 35억→84억(반년), 추론>학습.
  • 통계청 통계개발원, 「통계플러스 2024년 봄호」 — AI 도입률 대기업 9.2%·중소 2.9%(2021 기준).
  • 중소기업중앙회(2025) — 중소기업 AI 도입률 5.3%.
  • 맹지은·이홍식, "AI 도입이 기업 성과 및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통계청 기업활동조사 2017~2023 패널, 2025) — AI 도입이 매출·부가가치·수출 증진.
  •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연구원, 「생성형 AI 활용의 대·중소기업 격차」(2026.6.10, 임금근로자 3,000명 설문) — 활용률 대기업 66.5%·중소 52.7%.
↩ [2] 국회예산정책처 「2025~2072년 장기재정전망」(2025.2)의 장기 추세값을 '2.2%→0.3%'로 보고한다. 단년 성장률 예측이 아니라 47년에 걸친 하향 경로를 말함이다.
↩ [3]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2022~2072년」(2023.12, 중위 시나리오). 생산연령인구 3,674만→1,658만, 총부양비 40.6→118.5(노년부양비 104.2), 고령인구 비중과 초고령사회 진입 시점이 이 추계를 따른다. 25~49세 1,860만→764만과 국제순이동 연 6만 명 중반대 가정은 동 추계 보도자료(2023.12.14).
↩ [4] 국제로봇연맹(IFR), World Robotics 2025(2026.4). 제조업 노동자 1만 명당 로봇 1,220대로 세계 1위, 2019년 이후 연평균 약 7% 증가.
↩ [5] 아동권리보장원, 디딤씨앗통장(아동발달지원계좌) 안내(2026). 2025년 매칭 1:2(본인 5만/정부 10만, 합산 월 최대 15만).
↩ [6] 금융위원회·서민금융진흥원, 청년도약계좌 및 기여금 확대(2025.1), 청년미래적금 추진(2026.6 출시 예정). 도약계좌 누적 가입 166만 명은 2025년 2월 기준. 미래적금은 월 50만·3년.
↩ [7] 보건복지부, 부모급여·아동수당 안내(2026). 부모급여 0세 월 100만·1세 월 50만, 아동수당 8세 미만 월 10만.
↩ [8]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2025년 기금운용 실적(2026.2). 적립금 1,458조(2025년 말, 2026.1 1,540조 돌파), 2025년 수익률 18.82%·수익금 231.6조. 삼성전자 7.8%·SK하이닉스 8.1% 지분은 DART 대량보유 공시 및 리더스인덱스 집계(2026.4). 국내주식 비중(목표 14.4%·허용 19.9%·실제 24.5%)은 기금운용본부 자산군별 비중(2025~26).
↩ [9] 보건복지부·국민연금공단, 국민연금법 개정(2025.3.20). 보험료율 9→13%(2033년까지), 소득대체율 41.5→43%, 국가지급보장 명문화. 기금 고갈 2055년 전후→2064년(운용수익률 5.5% 가정 시 2071년).
↩ [10] 금융위원회, 국민성장펀드 운용방안(2025.9)·출범(2025.12.10)·국민참여성장펀드 판매(2026.5~6). 5년 150조, 12개 첨단전략산업(AI 30조·반도체 20.9조 등), 국민참여형 한도 5년 2억·모집 7,200억(국민 6천억+재정 1,200억).
↩ [11] 기획재정부, 소득세법 개정(금융투자소득세 폐지, 2024.12) 및 2025·2026 세제개편. 증권거래세 2026년 0.20% 환원, 대주주 기준 50억 유지(10억 강화 무산), 가상자산 과세 2027년 연기, 고배당 분리과세(최고 30%) 신설.
↩ [12] 국회예산정책처, 「2025~2072년 NABO 장기재정전망」(2025.2). 국가채무 1,270조(GDP 47.8%)→7,303조(173.0%), 관리재정적자 2030년 99조→2060년 227조. 기획재정부 제3차 장기재정전망(2025.9)은 2065년 국가채무 비율을 기준 156%·최대 173%로 전망. 실질성장률 추세는 주 2 참조.
↩ [13] 자본시장연구원(2025). 상장주식 개인 투자자 1,423만 명(2024년 말), 가상자산 이용자 1,077만 명(2025년 상반기).
↩ [14] Menlo Ventures, "2025: The State of Generative AI in the Enterprise"(2025). 2025년 파운데이션 모델 API 지출 125억 달러, 생성형 AI 인프라층 180억 달러. 기업 LLM 지출 35억→84억 달러(반년), 추론>학습.
↩ [15] 맹지은·이홍식, "AI 도입이 기업 성과 및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통계청 기업활동조사 2017~2023 패널, 2025). AI 도입이 매출·부가가치·수출을 키운다.
↩ [16] AI 도입률 대기업 9.2%·중소기업 2.9%(2021 기준)는 통계청 통계개발원 「통계플러스 2024년 봄호」. 중소기업 도입률 5.3%는 중소기업중앙회(2025).
↩ [17]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연구원, 「생성형 AI 활용의 대·중소기업 격차」(2026.6.10, 임금근로자 3,000명 설문). 생성형 AI 활용률 대기업 66.5%·중소기업 52.7%.
↩ [18] 사전분배(predistribution)는 제이컵 해커(Jacob Hacker, 2011)가 벼린 말이다. '재산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는 제임스 미드(James Meade, 1964)와 존 롤스의 개념으로, 롤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복지국가 자본주의와 구별해 이 길을 옹호했다. 자본수익률>성장률(r>g)과 자본 몫의 상승은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 2013)의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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