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공유하는 기쁨
부제: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사상적 토대를 묻다
김현제 씀
2026년 입하
0. 들어가며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다음
2024년 가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탈고했다. 평범한 중소기업 경영자로 일선에 선 지 만 십 년이 지난 시점에 어렵게 정리한 결의의 기록이었다. 진창투성이 참호전에서 운에 기대어 살아남은 사람이, 다음 십 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 적어 둔 글이다. 범인(凡人)도 정성을 다하면 잘 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기틀을 기업 안에 만들어 보자는 글이었다. 그러기 위해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자본의 소유권을 민주화하는 일, 그것을 기업 안에서 해 보자는 결론에 닿았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라는 모델이다.
생각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유럽과 미국은 물론 중국조차 이미 제도화하여 일반적으로 정착시킨 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 같은 제도를 여태 갖추지 못했음을 알고서, 현존하는 제도를 샅샅이 뒤졌다. 그 끝에 공동근로복지기금을 세워 임직원이 회사의 지배구조와 의사결정 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비영리임의단체 커먼웰스도 함께 세웠다. 회사가 담을 수 없는 ‘공동체로서의 일’을 그곳이 맡도록 했다. 기존 노사협의회 운영에 민주성을 강화하고 이사추천위원회를 새로 만들었다.
제도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좋은 제도가 그저 제도에만 그치는 것을 여러 차례 봐왔기에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임직원이 스스로를 윤리적이고 책임 있는 주체로 자각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은 환경과 체계를 갖추어 놓는다고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몇몇 오피니언 리더가 권장한다고 해도 쉽게 자리잡지 못한다. 그러한 권장은 자칫 민주성의 명분을 덧씌운 강제가 되기 쉽다. 창발의 근원인 예측 불가능성과 복수성(Plurality)을 도리어 죽이는 기제로 작동할 위험이 크다. 이윤을 좇아야 하는 사기업이라면 그 위험은 더 크다. 결국 임직원의 민주적이고 주도적인 참여는 일종의 정치 참여와 같다. 구성원이 자기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탈고할 무렵 내가 이른 잠정적 결론이었다.
2024년 12월 3일, 그리고 그 뒤
「무엇을 할 것인가」를 탈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2·3 불법 계엄이 터졌다. 그날 밤 나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계엄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를 파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만약을 대비해 가족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을 돌아보면 부끄럽다. 나는 그날 국회로 갔어야 했다. 가족만을 떠올린 그 빠른 판단의 밑바닥에는 여태껏 내가 떨치지 못한 비겁함이 깔려 있었다.
이후 일 년이 훌쩍 지났다. 국회가 즉시 계엄 해제를 결의했지만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친위 쿠데타였기에 쉽사리 정리될 수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블랙 코미디만도 못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광장과 미디어와 국회와 크고 작은 모임에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보았다.
한쪽은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한나 아렌트가 경고한 전체주의를 떠올리게 했다. 색색의 응원봉을 흔드는 시민 옆에서 누군가가 만들어 배포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자들이었다. 같은 광장에 서 있어도 그들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기 어려웠다. 시민(市民)과 신민(臣民)의 거리가 그만큼 멀었다.
다른 한쪽은 공직 세계가 보여준 무사유였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본 ‘순전한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까지는 아니더라도, 손익을 따지는 계산적 사유에는 능하면서 의미를 묻는 사유에는 무능한 자들. 한때 유능했던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 무능한 인간으로 전락하는지를 매일 목격했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경고는 그 둘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왔다. 바로 공존과 연대를 외치는 사람들, 내 눈에는 이들 역시 오랜 시간 쌓여 온 구조적 불합리라는 거대한 적과 맞서기 위해 감정적 일체감으로 잠시 뭉쳐 있을 뿐, 작은 균열에도 쉽사리 흩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바로 그 점이 임직원의 민주적이고 자발적이며 주도적인 참여를 가능케 하는 지속 가능한 기업 지배구조를 설계하려는 내게 새로운 경고로 다가왔다.
두 갈래의 경고
광장에서 내가 엿본 경고를 두 갈래로 정리하면 연대의 일시성과 이중성이다.
일시성. 같은 대의 안에서 저마다 개별성을 지닌 조직들이 거대한 위기에 봉착해서야 비로소 연대했다. 위기의 강도가 약해지는 구간마다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 대신 다시 눈을 감고 귀를 막는 편안함을 택했다. 위기가 다시 오면 또 잠깐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패턴이 반복됐다. 이런 연대는 지속 가능한 토대가 될 수 없다.
이중성. 이 연대가 누구에게나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폐쇄적 동호회의 성격을 띠었다. 폐쇄성 그 자체가 진짜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이 부딪치고 오가는 지속 가능한 담론장을 만들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의견 제시와 설득으로 상향식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이 부지불식간 사라졌다. 효율과 결과의 확실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끝내 유능해 보이는 리더에게 모든 권리를 위임하는 패턴으로 흘렀다. 연대를 통해 그토록 회복하고자 한 민주성의 상실. 그것이 우리 안에서도 일어났다.
이 두 갈래 경고는 광장의 문제인 동시에 내가 속한 회사의 문제였다. 내가 짓고 있는 제도가 자칫 껍데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직시였다. 사람들이 위기 때만 잠깐 참여하고, 평소엔 무관심하며, 이슈가 생기면 유능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결정을 떠넘기는 패턴. 그것이 우리 회사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부분적으로 재현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치철학으로
지난 십 년을 다시 돌아봤다. 기업이라는 조직의 본질을 다시 더듬었다. 구성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더 가까이서 보려 했다. 실패한 사례뿐 아니라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례에서도 민주성과 주도성이 빠진 지점을 찾으려 했다. 거듭 이른 생각이 있다. 기업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결합한 조직이며, 동시에 구성원의 ‘행위의 형태’다. 기업이라는 거푸집은 늘 같지 않다. 그 안에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위가 매일 다른 모양의 기업을 빚는다.
기업이 행위의 형태라면, 기업을 이해하는 일은 곧 행위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래서 행위를 다룬 철학을 공부했다. 기업의 ‘행위 구조’, ‘권력 구조’, 곧 ‘정치적 구조’를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한 해 동안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소환된 사람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였다. 아렌트에서 시작해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에 닿았다. 아감벤에게서 다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의 언어 분석을 포착했다. 개념의 기원과 본래 뜻, 그것이 역사의 과정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공부했다. 이는 아렌트가 일관되게 써 온 방법이기도 하다.
머릿속 아이디어와 잡다한 메모들을 하나의 글로 종합하는 시도는 『황해문화』 2025년 가을호의 한나 아렌트 특집을 읽으면서 착수했다. 김만권은 「계엄에서 혁명으로」에서 슈미트의 적-친구 정치와 아렌트의 동료애를 갈라 12·3 계엄 이후의 광장을 읽었다. 양창아는 「정치적인 삶, 인간적인 삶의 조건」에서 아이히만의 무사유와 사유의 조건을 짚었다. 김세원은 「한나 아렌트와 정치적인 것」에서 탄생성과 복수성, 권력과 그 비판자들을 정리했다. 세 글은 사회와 광장을 읽었다. 나는 그 읽기를 기업이라는 자리로 옮긴다. 기업 역시 사회의 일부이자 작은 사회다. 여러 사람이 모여 매일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정치적 구조를 지닌다고 믿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세 글에 기댄 자리는 그때그때 각주로 밝혔다. 그 위에 내가 새로 쌓은 것은 일터에의 적용이다.
이 글의 자리
이 글은 정치철학 논문이 아니다. 학자가 쓴 학술 보고서가 아니라 기업 경영자가 자기 사상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자본주의 안에서 넘어서려는,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라는 모델을 만들고 운영하려는 경영자가 그 모델이 껍데기로 전락하지 않게 하려고 행위와 권력의 본질을 다시 묻는 글이다.
이 시도는 또 한 번의 ‘시작’이다. 아렌트가 말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위다. 어쩌면 아무도 발 들인 적 없는 원시림에 첫발을 내딛는 일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부디 뒤를 따르는 발걸음이 있어 여러 사람의 발자국으로 다져진 길이 생겨 나기를 바란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는 일은 편안하지만, 새로운 길을 내는 시작의 행위만이 더불어숲을 살아 있게 만들고 인간다운 삶의 흔적을 남긴다고 나는 믿는다.
이 글의 본문은 학술 분석의 톤을 따른다. 바로의 라틴어 분석, 아렌트의 활동적 삶의 위계, 아이히만에게서 본 무사유와 행위의 결여, 아렌트의 권력론과 이소노미, 슈미트와 아렌트의 갈림길에서 본 적-친구 구도와 동료애의 정치, 아감벤의 제스처 개념을 차례로 살핀다. 그리고 통합 분석을 거친 뒤 아렌트의 한계와 그 비판자들의 관점도 살핀다. 결론에서는 이 글의 진단이 폴라니·슈마허·케인즈의 정치경제학과 어떻게 호응하는지를 묶는다. 그 다음 이 분석이 내 일터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두 모델 — 거버넌스 코드와 ESG 3단계 모델 — 의 골격으로 짧게 풀어 둔다. 자세한 설계는 별도 부속 문서로 미루었다. 본문 분석에서 길어 올린 정치철학이 그 두 작업의 토대가 된다는 점만 결론에서 확인하고자 한다. 그 분석을 거친 뒤 내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는 이 글 끝의 「닫으며」에서 다시 말하기로 한다.
그 사이의 분석은 학자들의 유산을 얼기설기 엮은 거푸집이다. 그러나 그 거푸집을 만든 것은 내 손이다. 그것으로 길어 올리려는 것은 매일 만나는 임직원의 얼굴이다. 글을 쓰는 동안 그 얼굴들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려 했다.
1. 행위 상실의 시대와 언어의 고고학
우리는 정치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ion)’가 사라진 자리를 ‘관리(Management)’와 ‘행정(Administration)’이 메웠다. 주권자가 결단하고 시민이 공론장에서 토론하던 옛 의미의 정치를, 이제는 거대한 행정 기계가 대신한다. 그 기계는 인구의 생물적 삶을 유지하고 경제적 생산성을 조절한다. 이 전환을 이해하려면 서구 사상이 인간의 활동을 분류해 온 범주들을 뿌리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이 위기는 관념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그 가장 또렷한 본보기다. 산업화 6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정치를 행정과 거의 같은 말로 써 왔다. 정치인이라는 단어는 고위급 행정가와 가까운 의미로 통용되었고, 시민의 정치 참여는 4~5년에 한 번 투표하는 일로 줄어들었다. 그 사이 거대한 행정 기계가 GDP를 키우고 집값을 관리하고 출산율을 걱정하고 안보를 떠받치는 일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2024년 12월 3일 불법 계엄과 그 이후 일 년 넘게 이어진 사태는 두 가지를 다시 가르쳐 주었다. 이 행정 기계가 한순간에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변질을 막는 것은 결국 행정이 아닌 다른 무엇, 곧 시민의 정치적 행위뿐이라는 것이다. 행위가 사라진 시대가 무엇을 잃는지 우리는 그 한 해 동안 날마다 보았다.
이 글은 로마 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가 제시한 동사 삼분법(Facere, Agere, Gerere)에서 출발한다. 이를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현상학적 구분(Labor, Work, Action)과 견주고, 아이히만에게서 본 무사유의 자리를 거쳐, 아렌트가 행위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권력론과 이소노미(Isonomy)를 살펴본 뒤,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와 갈라지는 자리에서 적-친구 구도와 동료애의 정치를 짚고, 마지막으로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제스처(Gesture)’와 ‘수단(Means)’ 개념으로 묶는다.
이 과정에서 다음 두 물음을 다룬다. 첫째, 현대 정치는 어떻게 ‘아게레(Agere, 주권적 행위)’의 영역에서 ‘게레레(Gerere, 행정적 수행)’의 영역으로 옮겨갔는가. 둘째, 이 거대한 관리의 그물 속에서 진정한 정치의 잠재력은 어떻게 ‘제스처’로 되살아날 수 있는가.
2. 바로(Varro)의 삼분법: 행위의 언어적·존재론적 기원
로마 학자 바로는 『라틴어론(De Lingua Latina)』에서 인간의 행위를 가리키는 세 가지 라틴어 동사를 구별했다. Facere, Agere, Gerere가 그것이다. 이 구별은 서구 정치철학의 숨은 매트릭스를 드러낸다. 단순한 어휘 분류가 아니다. 행위 주체가 시간, 사물, 공동체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규정하는 존재론의 범주다.
2.1 Facere(파케레): 만들고 내놓는 일
Facere는 어원으로 ‘만들다’, ‘세우다’를 뜻한다. 그리스어 ‘포이에시스(poiesis)’와 짝을 이룬다. 바로는 시인(poeta)을 본보기로 든다.
- 밖에 남음(Externality): Facere의 가장 큰 특징은 행위의 결과물이 행위자에게서 떨어져 나와 독립된 객체로 남는다는 점이다. 시인은 연극을 ‘만들지만(facit)’ 그 연극을 무대에서 연기하지는 않는다. 이때 희곡이라는 작품은 시인의 행위가 끝난 뒤에도 세상에 남는다.[1]
- 결과물에 매임(Teleology): 만드는 행위는 결과물(목적)에 철저히 매인다. 구두공의 행위는 오직 구두를 완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구두가 완성되는 순간 사라진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이것은 도구적 이성의 영역이며, 자연을 변형하기 위해 폭력을 쓰는 과정이다.[2]
- 영역: 장인, 예술가, 기술자의 일이다. 정치로 옮기면 ‘국가 건설(State-building)’이나 ‘제도 설립’ 같은 공학적 접근과 닿는다.
2.2 Agere(아게레): 행하고 드러내는 일
Agere는 ‘움직이다’, ‘몰다(drive)’, ‘행하다’를 뜻한다. 그리스어 ‘프락시스(praxis)’와 짝을 이룬다. 바로는 이를 배우(actor)의 활동으로 풀이한다.[3]
- 안에 머묾(Immanence): 배우는 연극을 ‘만들지(facere)’ 않고 ‘연기한다(agit)’. 이 행위는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다.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고, 행위가 멈추면 그 실체도 사라진다. 무용수의 춤이나 연주자의 연주는 그 수행 과정 속에서만 존재한다.[4]
- 시간을 살기(Temporality): Agere는 시간을 견디고 끌고 가는 일에 가깝다. ‘삶을 영위하다(vitam agere)’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펼쳐지는 활동이다.
- 정치의 차원: 고대 로마에서 agere는 법정에서 변론하거나 민회에서 연설하는 시민의 활동을 가리켰다. 타인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진짜 의미의 ‘정치적 행위’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5]
2.3 Gerere(게레레): 떠맡고 다스리는 일
바로의 가장 독창적이고 정치철학적으로 중요한 기여는 제3의 범주, 게레레(gerere)의 발견이다. Gerere는 ‘나르다(to carry)’, ‘지탱하다(to sustain)’, ‘수행하다(to conduct)’를 뜻한다.[6]
- 떠받침(Sustenance): 바로는 장군(Imperator)이나 정무관(政務官, Magistrate, 치안판사/행정관으로도 번역 가능)의 행위를 설명하면서, 그들이 facere도 agere도 하지 않고 다만 gerere 한다고 못박는다. Gerere는 짐을 지는 사람(onera gerunt)에게서 유래한 말이며 ‘지탱한다(sustinet)’는 뜻을 품는다.[7]
- 직무를 짊어짐(Office): Gerere는 창조적인 제작도 화려한 연기도 아니다. 주어진 직무나 과업을 ‘떠맡아 수행하는’ 일이다. ‘전쟁을 수행하다(bellum gerere)’나 ‘국사를 돌보다(rem publicam gerere)’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어떤 사태나 사무(res)를 책임지고 다스리는 행위다.[6]
- 행정의 탄생: 이것이 오늘날 ‘행정(Administration)’과 ‘경영(Management)’의 원형이다. 장군은 전쟁을 만들지 않고 다스린다. 정무관은 국가를 만들지 않고 유지한다. Gerere는 주권적 결단보다 사물의 배치와 관리에 가깝다.[8]
| 라틴어(Varro) | 본보기 인물 | 행위의 성격 | 결과물과의 관계 | 오늘의 함의 |
|---|---|---|---|---|
| Facere | 시인(Poet) | 만듦(Making) | 밖에 남는 산출물(작품) | 기술공학, 입법 |
| Agere | 배우(Actor) | 행함(Acting) | 행위 자체(수행) | 정치적 토론, 혁명 |
| Gerere | 장군/정무관 | 떠맡음(Bearing) | 사태의 지탱(관리) | 행정, 경영, 통치 |
3.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활동적 삶의 위계
이 장의 아렌트 해설은 『인간의 조건』을 직접 따른다. 내가 더하는 것은 둘이다. 이 위계를 앞 장에서 본 바로의 삼분법과 포개는 일, 그리고 ‘사회의 부상’을 ‘행정의 승리’로 읽어 이 글 전체의 진단을 여는 일이다.
한나 아렌트는 바로의 이 구분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제시한 Labor, Work, Action의 삼분법은 바로의 도식과 깊은 현상학적 공명을 이룬다. 아렌트의 분석이 고발하는 바는 이것이다. 근대는 ‘행위(Action/Agere)’를 잃고 ‘노동(Labor)’과 ‘관리(Administration/Gerere)’의 시대로 들어섰다.
아렌트의 분석을 따라가려면 먼저 그 분석이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렌트는 ‘정치적(political)’이란 말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 폴리스(Polis)의 특정한 삶의 방식(Bios)에서 찾았다. 단지 언어적 원형 때문이 아니다. 폴리스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가장 또렷이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삶을 들여다보며 사적 영역인 오이키아(Oikia, 가정)와 공적 영역인 폴리스(Polis, 광장)를 구분했다. 오이키아는 동물적 필연성, 즉 생존의 영역이다. 경제성과 효율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오이키아는 주인이 노예에게 명령하고 가장이 식구에게 명령하는 지배와 폭력의 불평등이 용인되는 공간이다. 반면 폴리스는 그 필연성 밖의 영역이다.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누구도 지배받지 않는 이소노미아(Isonomia, 법적 평등) 안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자유와 평등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힘과 폭력이 일을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말(lexis)과 행위(praxis)로 각자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드러내며 서로 설득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 두 개념의 대비를 머릿속에 두고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위계를 따라가야 한다. 노동·작업·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오이코스의 자리[9]에 갇혀 있고 어느 것이 폴리스의 자리에서 꽃피는지가 다음 절들의 핵심 물음이다.
3.1 노동(Labor): 생물학적 필연에 매인 자리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다. 생존이라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10] 노동의 산물 — 음식 따위 — 은 생산되자마자 소비되어 사라진다. 자연의 순환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이다. 아렌트는 이를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활동이라 부른다.[11]
바로의 도식에는 노동이 명시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생명을 지탱한다’는 면에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gerere — 떠맡음·지탱 — 와 연결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이것은 노예의 영역이자 사적 영역(Oikos)에 갇힌 일이었다.
3.2 작업(Work): 세계를 짓는 자리
작업은 자연환경과 구별되는 인공의 세계(The World)를 건설하는 활동이다. 도구, 건축물, 법률, 제도가 여기에 들어간다.[10] ‘공작인(Homo faber)’의 활동인 작업에는 분명한 시작과 끝 — 완제품 — 이 있다. 도구적 이성, 곧 수단-목적의 사슬이 이를 다스린다.[2]
바로의 도식에서 이는 명백히 Facere의 영역이다. 아렌트는 근대 정치가 국가를 하나의 ‘제작물’로 보고 폭력으로 사회를 주조하려는 경향, 이른바 전체주의적 공학을 비판한다. 정치를 Agere가 아닌 Facere로 잘못 본 결과다.[10]
3.3 행위(Action): 복수성과 시작이 꽃피는 자리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개입 없이 인간들 사이에서 직접 일어나는 유일한 활동이다. 말(Speech)과 행함(Deed)으로 자기 고유함을 타인에게 드러낸다.[12]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의 활동이다. 예측할 수 없고(unpredictable), 되돌릴 수 없다(irreversible). 새로 시작하는 능력, 곧 탄생성(Natality)에 뿌리를 둔다.[13]
행위는 바로의 도식에서 Agere와 호응한다.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다(archein)’와 ‘성취하다(prattein)’가 본래 하나였으나 뒤에 갈라졌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통치자가 명령하고 신민이 수행하는 구조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아렌트가 그리는 이상의 정치는 시민들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Agere의 공간이다.
세 활동의 차이를 비유로 풀어 보면 이렇다. 앱 개발자가 코드를 짜서 특정한 목적이 있는 앱을 만드는 일은 작업이다. 그 앱을 쓰는 사용자들이 모여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안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토론을 하고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은 행위다. 말과 행함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활동, 그것이 행위이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본질이다.
3.4 ‘사회(The Social)’의 부상과 행정의 승리
아렌트 정치철학의 한복판에는 이런 진단이 놓인다. 근대에 들어 ‘가정(Oikos)’의 관심사인 생물학적 생존과 경제(Economy)가 공적 영역으로 밀고 들어와 ‘사회(The Social)’라는 거대한 잡종 영역을 낳았다.[14]
사회가 떠오르자 정치적 Agere — 자유로운 행위 — 는 쓸모를 잃었다. 그 자리를 거대한 가정(Super-family)을 다스리듯 국가 전체를 관리하는 일이 차지했다. 이제 통치자는 영웅적 행위자가 아니다. 국민 경제와 생명 활동을 관리하는 행정가(Administrator)다. 아렌트는 이를 ‘아무도 아닌 자의 통치(Rule by Nobody)’, 곧 관료제라고 불렀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의 ‘노동(Labor)’ 비판이 바로의 Gerere — 관리·지탱 — 와 만난다. 근대 정치는 ‘행위(Action)’를 버리고 생명 과정을 효율로 ‘지탱(Sustinet)’하는 거대한 Gerere 체제로 변모했다.
이 변모는 우리 일상의 풍경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이 더 좋아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주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그것이 공원을 짓자는 합의에 닿아 다시 어떤 공원을 어떻게 지을지 새로운 토론을 시작하는 과정 — 본래 정치란 그런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사라졌다. 대신 얼마의 세금을 어떻게 집행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공원을 만들 수 있는지를 전문가들이 계산하는 문제로 바뀌었다. 시민은 더는 공동체의 주인이 아니다. 행정 서비스의 고객이다.
한국은 이 진단에 딱 들어맞는 본보기다. 압축된 산업화 60년 동안 우리 사회는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한 사회 중 하나가 되었다. 정치 의제의 대부분을 GDP·고용률·집값·출산율이 차지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들이 앞다투어 차지하려는 자리도 결국 누가 더 유능한 살림꾼인가로 귀결된다. 큰 정당들은 정책 자료집 표지에 민생이라는 두 글자를 거의 빠짐없이 적는다. 민생이라는 말 자체가 살림이라는 뜻이다. 정치의 자리가 가정의 살림 자리로 이동했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다. 이 거대한 가정의 살림을 떠맡은 자리에 행정이 들어선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관료제가 들어선다. 아렌트가 본 아무도 아닌 자의 통치가 한국에서 가장 유능해 보이는 한 사람의 통치라는 다른 얼굴로 거듭 작동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안다. 위기 때마다 시민은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 평소에는 정치가 자기 일이 아니므로. TV에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고, 명절 식탁에서 정치에 대해서는 쉬쉬하고, 복잡한 일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며 등을 돌린다. 소소한 행복을 챙기는 소확행이 실용적이고 겸손한 태도로 통한다. 그렇게 정치는 일상에서 한 발씩 멀어진다.
4. 아이히만의 그림자: 무사유와 행위의 결여
이 장의 아이히만 해설은 양창아의 「정치적인 삶, 인간적인 삶의 조건」(『황해문화』 2025년 가을호)에 기댄다. 내가 더하는 것은 그 무사유를 일터로 옮기는 일이다. 무사유는 광장에만 있지 않다. 회사 안에도 있다.
3장에서 본 아렌트의 위계 구분에는 한 가지 빠진 자리가 있다. 행위의 자리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졌지만, 행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는 아직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다음 장에서 다룰 권력과 이소노미의 자리로 가기 전에 한 단계 더 거쳐야 할 물음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행위 능력을 잃는가? 아렌트는 이 물음에 한 사람의 이름으로 답했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다.
4.1 악의 평범성: 깊이 없음의 발견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유대인 600만 명을 절멸 수용소로 보낸 사람이다. 아렌트는 그 재판을 참관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1963)를 썼다. 책 제목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격렬한 논쟁거리다.[15]
이 표현이 낳은 오해부터 풀자.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그가 대량학살에 그저 부품처럼 가담했다고 해서 그의 책임이 줄지는 않는다고 못박았다. “우리는 모두 유죄”라는 식의 집단 죄책론은 도리어 범죄를 무마한다며 거부했다. ‘평범성’은 그의 악행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려는 표현이 아니다.[15] 그것은 악인이라면 으레 심연(深淵)이 있으리라는 통념을 깨려는 말이다. 루시퍼의 마성도 사디스트의 잔혹함도 그에게는 없었다. 아렌트가 그에게서 본 것은 ‘비상한 천박함(extraordinary shallowness)’과 ‘순전한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이었다. 깊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토록 무거운 죄가 나왔다. 깊이 있는 악이 아니라 깊이가 없어서 더 무서운 악, 아렌트가 발견한 새로운 악이다.[16]
다른 오해도 풀고 가자.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는 손익을 따지는 계산적 사유에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것을 양으로 환산해 효용을 따지는 데 능란했다. 운송 효율, 처리 속도, 자원 배분의 최적화. 이런 것들에 그는 능숙했다. 그가 무능했던 지점은 따로 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자기 일의 의미를 스스로 묻기. 거기서 그는 텅 비어 있었다.
4.2 사유란 무엇인가: 내 안의 타자와 나누는 대화
아이히만에게 무엇이 빠졌는지 보려면 아렌트가 사유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봐야 한다. 아렌트는 사유(thinking)와 지식(knowing)을 엄격히 구분했다. 사유는 의미를 묻는 일이고 지식은 사실을 아는 일이다.[17] 학식이 깊어도 사유하지 못할 수 있고, 학식이 얕아도 사유할 수 있다.
아렌트가 그린 사유는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와의 대화다. 입장이 다른 목소리를 내 안에 들이고, 그 목소리들이 내 안에서 묻고 답하게 하는 일이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의 입장에서 보는 연습이다.[18] 그렇다. 사유는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복수의 일이다. 내가 혼자 책상에 앉아 머리를 굴려도, 그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복수의 목소리가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복수성(Plurality)은 행위의 조건일 뿐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기도 하다.[18] 아렌트가 정치에서 본 복수성과 사유에서 본 복수성은 같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이제 아이히만의 무능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보인다. 그는 타자의 목소리를 자기 안에 들이지 못했다. 자기가 보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태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말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거짓말이 아닌 ‘개소리’ — 진실인지 거짓인지 상관없이 자기 필요에 맞춰 나오는 말, 속셈만 있을 뿐 의미가 없는 말 — 를 했을 뿐이다.[19]
4.3 사유의 결여가 곧 행위의 결여로 이어지는 까닭
사유의 조건과 행위의 조건이 복수성이라면, 사유와 행위는 같은 토대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무너진다. 사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위하지 못한다. 사유하지 못하는 사람의 움직임은 더는 행위(Action)가 아니라 행동(Behavior)이 된다.
행동과 행위는 다르다. 행동은 자극에 반응하는 일이다. 동물이 하고, 잘 훈련된 관료가 하고,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부품이 하는 일이다. 예측 가능하다. 자극이 같으면 반응이 같다. 시작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다. 행위는 다르다. 타자와 만나 자기를 드러내는 예측하기 어려운 새로운 시작이다. 타인의 자리에서 사태를 보는 능력이 없으면 행위가 행동으로 떨어진다. 사람이 부품이 된다. 아이히만이 그랬다.
아렌트의 이 분석은 한 사람을 향한 진단을 넘어선다. 현대의 거대 조직이 인간을 대상으로 작동하는 기제에 대한 진단이다. 관료제는 깊이를 요구하지 않는다. 절차를 따르고 효율을 높이고 손익을 따지는 능력만 요구한다. 의미는 묻지 말라고 한다. ‘이 일이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가?’, ‘상대의 처지에서 이 일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묻기 시작하면 일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지 않도록 훈련받는다. 그 훈련의 끝에 아이히만이 있다.
4.4 광장의 두 얼굴, 그리고 일터의 두 얼굴
이 분석은 서두에서 언급한 광장의 두 갈래 경고와 곧장 만난다. 12월 3일 이후의 광장에서 본 공직 세계의 무사유 — 손익 계산에는 능하면서 의미 판단에는 무능한 자들의 모습 — 가 곧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본 모습이다. 한국 사회의 큰 사고 뒤에서 예외 없이 마주치는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매뉴얼을 따랐다”, “나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나는 보고 받은 대로 결재했다” 같은 말이 거듭 나온다. 그 말의 깊이가 비어 있는 자리가 바로 무사유다.
그러나 더 무거운 직시가 남아 있다. 이 무사유가 광장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속한 회사 안에서도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프로젝트 일정을 맞추려고, 비용을 줄이려고, 위에서 내려온 KPI를 맞추려고 사람들은 의미를 묻는 행위를 멈춘다. “이 결정이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묻는 일은 사치스러운 일이 된다. 효율과 확실성의 압력 아래 사유의 자리는 가장 먼저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지면 행위도 사라진다. 사람이 부품이 된다.
베블런이 말한 ‘훈련된 무능력(Trained incapacity)’이 정확히 이 자리를 가리킨다. 어떤 일에 능숙해지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그 훈련 때문에 다른 일에 무능해지는 현상. 효율을 따지는 일에 능숙해지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그 훈련 때문에 의미를 묻는 일에 무능해진다. 아이히만은 이 무능의 정점이었지만, 한국의 많은 회사 안에도 이 무능이 일상의 모습으로 거듭 자라고 있다.
4.5 이 통찰이 가져오는 것
이 분석이 임직원공동소유기업에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지분을 나눠 갖는 일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핵심은 임직원이 자기 일이 회사 전체에, 동료에게, 사회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묻기 시작할 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다. 그곳을 마련하지 않으면 지분의 분산은 또 다른 형태의 무사유로 이어진다.
노사협의회와 이사추천위원회는 단순히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유하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의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자기 안에 들이는 연습, 타자의 자리에서 사태를 보는 연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효율의 압력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빨리 결정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줄이면, 사유의 기회가 줄고 결국 행위도 사라진다.
이 보호는 추상적인 다짐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다. 안건이 쌓여 있는 회의에서 누군가 “이 선택이 현장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요?”라고 물으면 회의가 늘어진다. 그 물음을 사치로 여겨 잘라내는 순간 사유의 자리가 한 뼘 줄고, 그런 일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는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을 일부러 하루 늦추기도 한다. 빠른 결정 하나보다 의미를 묻는 한 사람을 지키는 편이 길게 볼 때 회사를 살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장 무거운 것은 경영자 자신의 사유다. 회사 안에서 권한이 가장 큰 사람이 제일 먼저 사유를 닫으면 그 닫힘이 조직 전체로 번진다. 경영자가 “이건 효율 문제다, 빨리 결정하자”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누구도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래서 늘 의식적으로 자기 안에 타자의 입장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 일이 결국 경영자가 일터에서 하는 일의 핵심이다.
이제 다음 물음으로 넘어갈 준비가 됐다. 사유와 행위가 같은 복수성의 토대 위에 있다면, 그 행위가 일어날 때 사람들 사이에 무엇이 발생하는가. 다음 장에서 다룰 권력과 이소노미가 그 답이다.
5. 권력은 어디에 있는가: 아렌트의 권력론과 이소노미
이 장의 권력론과 이소노미는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혁명론』을 직접 따른다. 권력을 ‘함께 생겨나는 것’으로 읽도록 이끈 것은 『황해문화』의 세 글이다. 내가 더하는 것은 그 권력을 기업 지배구조의 언어로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3장에서 아렌트가 활동적 삶을 노동·작업·행위로 나누었음을 살펴보았고, 4장에서 사유와 행위가 같은 복수성의 토대 위에 서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이 위계의 구분과 사유의 분석만으로 다 드러나지 않는다. 행위의 자리에는 권력이 있고, 권력의 자리에는 이소노미(Isonomy)가 있다. 이 둘을 제대로 살피고 넘어가지 않으면 아렌트가 왜 행위의 회복을 그토록 끈질기게 말하는지, 그것이 왜 이 글의 기업 지배구조 논의와 맞물려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5.1 권력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권력을 개인이 가진 무엇이라 여긴다. 대통령의 권력, 회장의 권력, 군주의 권력. 이런 통념에 아렌트는 정면으로 맞선다. 권력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가진 물리력이나 영향력은 권력이 아니라 그저 힘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공적 영역에서 함께 말하고 행위할 때 그들 사이에 잠재해 있다가 생겨나는 에너지에 가깝다.
촛불 집회의 광장에서, 빛의 혁명의 거리에서 그 잠재해 있던 에너지가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 흩어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모일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권력은 합쳐 가지는 것이지 누구 한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렌트의 말이다.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 그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20]
이 지점에서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칼같이 구분한다. 폭력은 도구가 필요하다.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한 사람이 무기 한 자루로 여러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 반면 권력은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 필요하다. 함께 행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권력은 커진다. 그래서 폭력이 등장하는 자리는 권력이 사라진 자리다. 군대가 광장으로 나오면 정치는 끝난 것이다. 12월 3일 그날 밤 우리는 그 사실을 다시 배웠다.
5.2 이소노미: 지배 없음의 정치
권력이 함께 행위할 때만 생긴다면, 그 함께 행위하는 자리는 어떻게 짜야 하는가? 아렌트의 답은 이소노미(Isonomy, 법적 평등)다. 이 개념은 한국 독자에게 낯설다. 흔히들 민주주의(Democracy)를 가장 좋은 정치체로 여긴다. 그러나 아렌트는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에 깃든 흠을 지적한다.
데모크라시의 어원인 그리스어 데모스(demos)는 민중을, 크라티아(kratia)는 지배를 뜻한다. 즉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민중의 지배’다. 주체가 민중으로 바뀌었지만 정치를 여전히 ‘지배’로 보는 틀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수의 지배든 소수의 지배든, 지배가 있다는 것은 곧 비지배의 자리, 명령받고 복종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정치를 이렇게 이해하는 한 우리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수직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흠을 깨려고 아렌트는 이소노미를 끌어온다. 이소(iso)는 ‘같음’이고 노미(nomy)는 ‘법’ 또는 ‘질서’다. 누구도 지배하거나 지배받지 않는 평등한 질서라는 뜻이다. 정치를 우월한 자의 명령이 아니라 평등한 시민들 사이의 말과 설득의 장으로 되돌리는 장치다. 아렌트가 비지배의 정치를 그릴 때 떠올린 자리가 바로 여기다.[21]
흥미로운 것은 아렌트의 어원 분석이다. 오늘날 ‘지배하다’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아르케인(archein)은 본래 ‘시작하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과 함께 그 행위를 완수한다는 뜻의 프라테인(prattein)과 짝을 이루어 행위자 사이의 상호의존을 가리켰다. 시작하는 자와 그 시작에 응답해 함께 완성으로 끌고 가는 자가 하나의 행위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archein은 시작의 뜻을 잃고 지배의 뜻만 남았다. 시작하는 자는 명령하는 자가 되고 응답하는 자는 복종하는 자가 되었다. 정치는 행위가 아니라 지배로 변질됐다.
아르케인이 지배가 아니라 시작이라는 본래의 뜻을 회복할 때 정치는 이소노미의 자리로 돌아온다.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면 다른 이들이 그 시작에 응답해 함께 완성한다. 시작도 응답도 누구나 할 수 있다. 명령과 복종은 없다. 이것이 아렌트가 그리는 정치의 가장 깨끗한 모습이다.
5.3 평등은 법으로 만들어진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소노미가 인간의 선한 본성에 기댄 낭만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그 반대를 말한다. 평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법과 제도로 만들어진다.
이 통찰은 아렌트가 18년간의 난민 생활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무국적자가 된 사람은 자기가 본래 가졌다고 여기는 인권조차 행사할 수 없다. 어떤 국가의 법 안에 자리잡지 못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잃는다. 따라서 천부인권 같은 추상적 보장은 환상에 가깝다. 모든 권리는 그것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있을 때만 실질을 얻는다. 이소노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선의나 도덕심만으로는 버티지 못한다. 평등의 자리를 안정적으로 받쳐 줄 법과 제도가 없으면 사라진다.
이 통찰에는 깊은 함의가 있다. 효율과 확실성을 좇는 사이 평등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는 끊임없이 허물어진다. 효율을 높이려 의사결정 절차를 단축하면 약자의 발언 시간이 먼저 줄어든다. 확실성을 얻으려 유능한 소수에게 권한을 몰아주면 다수의 의견은 자연히 자리를 잃는다. 그래서 이소노미는 가만히 두면 사라진다. 끊임없이 의식해서 지키지 않으면 명령과 복종의 수직 구조가 슬그머니 되돌아온다. 들머리에 쓴 광장의 두 갈래 경고 — 연대의 일시성과 이중성 — 가 가리키는 자리도 결국 여기다.
아렌트는 미국혁명에서 등장한 평의회, 파리코뮌의 자치 조직, 1956년 헝가리 봉기에서 나타난 노동자 평의회를 주목했다. 거기서 그는 이소노미의 단편들을 보았다. 혁명이 단지 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평등한 시민들이 함께 행위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의 건립이었던 순간이다. 혁명은 그곳을 영속화하는 데 거듭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가 그 자리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한 번이라도 그런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면, 다시 또 만들 수 있다.
12월 3일과 그 이후 한 해를 이 통찰의 빛에 비춰 보면 우리가 잃을 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분명해진다. 그날 밤 군대가 국회로 진입하던 순간, 검찰이 정치적 사건의 결정자로 부상하던 자리, 행정 권력이 입법부의 결정을 지연시키거나 우회하던 자리 — 이 모든 자리에서 침식되고 있었던 것은 단지 민주적 절차가 아니다. 평등을 떠받치는 법과 제도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한국 사회가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느 한 정치인의 결단이 아니라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함께한 행위였다. 한국 시민은 한 번 더 이소노미의 단편을 만들어 냈다. 미국혁명·파리코뮌·헝가리 봉기에 이은 또 하나의 단편이다. 그러나 그 단편이 영속하는 자리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다. 평등을 떠받치는 법과 제도를 매일 의식해서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광장의 결의가 행정의 일상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그 결의는 날마다 새로 시험대에 오른다.
5.4 이 통찰이 가져오는 것
이 분석이 임직원공동소유기업에 던지는 의미는 분명하다. 먼저 권력의 정의를 바꾸어야 한다. 기업 지배구조를 논할 때 흔히 권력을 어디에 둘 것이냐를 묻는다. 대주주의 권력, 이사회의 권력, 경영진의 권력. 그러나 아렌트의 통찰에 따르면 그 모든 것은 권력이 아니라 힘이거나 권한이다. 진짜 권력은 임직원이 함께 말하고 행위할 때 그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잠재 역량이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은 그 잠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회사 안에 건설하는 시도다. 지분이라는 형식은 그 자리의 재료일 뿐 그 자리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제도의 무게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평등은 법으로 만들어진다는 아렌트의 통찰은 기업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노사협의회의 운영 규정, 이사추천위원회의 절차, 공동근로복지기금의 의결 구조 — 이것들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이소노미가 살아 숨쉴 수 있는 자리를 날마다 새로 쌓아 올리는 일이다. 그래야 지배의 유혹을 직시할 수 있다. 효율과 확실성의 압력 아래 모든 조직은 명령과 복종의 구조로 되돌아가기 쉽다. Archein이 시작의 뜻을 잃고 지배의 뜻만 남는 그 변질이 기업 안에서도 늘 일어난다. 제도가 흐트러지면 평등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그리고 평등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권력도 사라진다. 명령과 복종, 곧 힘과 폭력만 남는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아렌트가 그린 정치의 본 모습이 보인다. 노동도 작업도 아닌 행위, 지배가 아닌 이소노미, 개인의 소유가 아닌 함께 생겨나는 권력. 그러나 이 모습은 잘 설계한다고 해서 항상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자리를 무너뜨리려는 가장 흔한 유혹이 있다. 적과 친구를 가르는 이분법이다. 다음 장에서 이 갈림길을 짚고 가야 한다.
6. 적인가 동료인가: 슈미트와 아렌트의 갈림길
이 장의 슈미트-아렌트 갈림길은 김만권의 「계엄에서 혁명으로」(『황해문화』 2025년 가을호)에 기댄다. 내가 더하는 것은 그 갈림길을 한국 기업의 문화에서 다시 찾고, 동료애를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자리로 옮기는 일이다.
권력이 함께 행위할 때만 발생한다는 것을 5장에서 보았다. 그러나 정치사에는 권력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흐름이 줄곧 있었다. 카를 슈미트(Carl Schmitt)가 그 흐름의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친구의 구별(Freund-Feind-Unterscheidung)에서 찾았다. 5장에서 본 아렌트의 정치 개념과 정확히 대척점에 서는 자리다. 이 두 자리의 갈림길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으면 이 글이 광장과 일터에서 매일 마주하는 가장 결정적인 위협의 정체가 흐려진다.
6.1 슈미트의 적-친구 구도
슈미트에게 정치는 적을 식별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적은 사사로운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공적인 적(Hostis)이다.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고집해 끝내 충돌할 수밖에 없는 타자다.[22] 슈미트는 이 구별이 약해지면 정치가 약해진다고 봤다. 모두가 친구인 자리에서는 결단도 사라지고 주권도 사라진다.
단순해서 매력적인 논리다. 누가 우리이고 누가 그들인지 또렷이 가른다. 위기의 순간에 빠른 결단을 가능케 한다. 우리 편을 단단히 묶는다. 광장에서 한 깃발 아래 모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위기가 깊을수록 슈미트의 구도가 더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이 구도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첫째, 이 구도의 권력은 원한(Resentment)에 기댄다.[23] 적이 있기에 결속하므로, 적이 사라지면 결속도 흔들린다. 그래서 적이 없어도 적을 만든다. 밖에 적이 없으면 안에서 적을 찾는다. 우리 안의 낯선 자, 제대로 된 우리가 아닌 자. 이 끝없는 배제가 결속의 동력이 되고, 정치는 원한의 골짜기로 미끄러진다.
둘째, 이 구도는 정치를 폭력으로 환원한다. 적과 친구의 구별이 정치의 본질이라면 그 구별의 끝은 적의 제거다. 슈미트가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정치의 결정적 순간으로 본 것도 그래서다.[24] 예외상태에서는 법이 멈추고 적을 제거하는 결단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가 1933년 나치 정권에 가담한 것을 그의 사상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는 평가도 있다.
6.2 아렌트의 동료애: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
아렌트는 정확히 여기서 슈미트와 갈라진다. 아렌트에게 정치의 본질은 적의 식별이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동료를 만나 함께 행위하는 일이다.[25] 5장에서 본 권력의 정의가 여기서 다시 살아난다. 권력은 함께 행위할 때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잠재 역량이다. 적이 있어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가 있어야 발생한다.
‘동료’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동료는 친구와 다르다. 친구가 사사로운 정으로 묶인 사이라면, 동료는 공적인 자리에서 함께 행위하는 사이다. 동료는 다툴 수 있다. 의견이 갈리고 격렬히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갈등은 같은 공적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누구도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누구도 상대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않는다.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한다.
그래서 갈등은 정치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강하게 만든다. 갈등은 복수성이 살아 있다는 표지이고, 복수성은 권력이 생겨날 토대다. 슈미트는 갈등을 적의 출현으로 보지만, 아렌트는 갈등을 동료들 사이의 다름의 드러남으로 본다. 그 다름이 모여 권력을 만든다.
아렌트는 이 지점에서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 — 함께 행위하고 권력을 나누는 데서 오는 기쁨 — 을 보았다.[21] 김만권은 이를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이라고 압축했다. 슈미트의 정치가 적의 제거에서 오는 결속의 쾌감을 동력으로 삼는다면, 아렌트의 정치는 함께 행위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동력으로 삼는다. 한쪽은 빼기에서 힘을 얻고, 다른 쪽은 더하기에서 힘을 얻는다.
6.3 12월의 광장에서 본 두 얼굴
슈미트와 아렌트의 갈림길은 추상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2024년 12월 3일 이후의 광장에서 날마다 보았다. 한쪽 광장에는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의견이 다른 동료가 함께 광장에 설 수 있음을 받아들였다. 남태령에서 시민과 농민과 여성과 장애인이 만난 자리, 자기 고유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함께 모였던 자리. 그것이 아렌트가 말한 정치의 영역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다른 한쪽 광장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결속은 적의 식별 위에 서 있었다. 누가 적인지 매일 새로 지목해야 결속이 유지됐다. 부정선거론, 외세 음모론, 종북 좌파론. 적의 모습은 매번 달라졌지만 적이 있어야 한다는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슈미트의 정치가 한국 사회에 전염된 모습이었다.
12월의 광장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새롭게 구축해야 할 정치의 토대는 ‘원한에 찬 적대’가 아니라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이어야 한다. 김만권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그렇다.[26] 적대로 모인 결속은 적이 사라지는 순간 흩어진다. 동료애로 모인 결속은 적이 없어도 살아남는다. 둘 중 어느 쪽이 지속 가능한 정치의 토대인지는 분명하다.
6.4 한국 기업의 적-친구 문화
이 갈림길은 광장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많은 기업이 자기도 모르게 슈미트의 적-친구 구도 위에서 굴러간다. 십 년 넘게 기업 경영자로서 지켜본 그 구도는 보통 네 얼굴로 나타난다.
가장 흔한 얼굴은 부서 간의 적대다. 영업과 R&D, 본사와 지사, 본부와 현장. 그 사이에 늘 우리와 그들의 경계선이 잠선해 있다. 분기 실적이 나쁜 회의에서 영업은 R&D가 경쟁력 있는 물건을 못 냈다 하고, R&D는 영업이 멀쩡한 물건을 못 팔았다 한다. 같은 손익계산서를 앞에 두고 서로를 적으로 세운다. “그쪽에서 또 이상한 요구를 한다”는 말이 회의실에 자연스럽게 오간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목적으로 일하는 동료가 어느새 적이 된다.
두 번째 얼굴은 노사 사이의 적대다. 한국의 노사관계가 오래 적-친구 구도 위에 서 온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단체교섭은 협상이 아니라 전선이 된다. 내 주장을 양보하면 지는 것이고, 관철하면 이기는 것이다. 교섭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양쪽은 상대의 입장을 적의 패로 읽는다. 거기에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권력은 빼앗거나 빼앗기는 무엇일 뿐, 함께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 얼굴은 내부의 진영이다. 한국의 많은 회사에 라인이 있다. 누가 누구의 사람인지, 누가 어느 계파인지가 회사 안의 지형을 만든다. 라인이 갈리는 순간 동료가 적이 된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라인과는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의견을 나누지 않는다. 보고 한 줄도 라인을 타고 흐르고, 라인 밖 사람은 회의실 끝자리에 앉는다. 끝내 한 결정권자에게 권한이 몰리고 그의 라인이 회사를 다스린다. 5장에서 본 아르케인의 변질, 시작이 지배로 미끄러지는 일이 이런 식으로 날마다 벌어진다.
네 번째 얼굴은 경영진과 직원 사이의 적대다. 어쩌면 가장 깊고 어두운 얼굴이다. 한국의 적지 않은 회사에서 경영진과 직원은 같은 광장에 선 동료가 아니다. 시키는 사람과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두 진영이다. 그 적대는 평소엔 드러나지 않고 깊이 묻혀 있다. 그러다 구조조정을 알리는 자리, 사고의 책임을 가리는 자리, 성과급을 나누는 자리에서 매번 표면 위로 떠오른다. 평소에 ‘한 가족’이라 부르던 말이 그 순간 빈말이 된다.
6.5 동료애의 기업 적용: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 가리키는 자리
이 글의 분석이 향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은 단지 지분의 분배나 공유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적-친구 구도를 동료 구도로 바꾸려는 시도다.
지분이 모두의 것일 때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위에서 시키는 사람과 아래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대항 구도다. 모두가 회사의 주인이 되는 순간 그 둘은 같은 곳에 선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갈등할 수 있지만, 그 갈등은 더는 적과 친구의 갈등이 아니라 동료들 사이의 다름이 된다. 그것이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 사상적으로 딛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리다.
물론 지분 공동소유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4장에서 본 사유의 자리, 5장에서 본 권력과 이소노미, 그리고 이번 장에서 본 동료애의 자리가 모두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셋이 함께 작동할 토대를 마련하는 첫걸음이 지분의 공동소유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사적 영역(오이코스)의 가장 깊은 표지가 주인과 노예의 구분이라면, 폴리스의 가장 깊은 표지는 동료들 사이의 평등이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은 회사를 가정에서 폴리스로 옮기려는 시도다.
노사협의회·이사추천위원회·공동근로복지기금·커먼웰스가 단순한 의사결정 절차를 위한 기구가 아니라는 점도 여기서 다시 살아난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결의를 모으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노사라는 적대의 구도를 동료의 구도로 옮겨가는 날마다의 연습이다. 그 연습을 거듭해야 동료애가 살아난다. 멈추면 적-친구 구도가 슬그머니 되돌아온다. 광장에서 보았듯이 일터에서도 그렇다.
각 기구가 하는 일을 나누어 살펴보면 더 또렷하다. 공동근로복지기금은 지분을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 시키는 사람과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사이의 구별을 없앤다. 노사협의회는 다름이 적대로 굳지 않도록 매주 부딪히고 설득하는 자리다. 이사추천위원회는 누가 회사를 대표할지 임직원이 함께 정하게 해 권한이 한쪽으로 몰리는 길을 막는다. 회사가 담지 못하는 공동체로서의 일은 커먼웰스가 맡는다. 네 자리는 따로 굴러가지 않는다. 대결 구도를 동료 구도로 옮기는 짐을 네 손이 나눠 든다.
그래서 이 자리들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막아야 할 사고가 아니라 살려야 할 신호다. 갈등이 사라진 노사협의회는 동료애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복수성이 죽었다는 징후다. 적-친구 구도가 다시 들어선 회사는 조용하다. 모두가 한 라인의 결정권자를 올려다보며 입을 닫기 때문이다. 대등한 동료들이 일하는 회사는 시끄럽다. 그 시끄러움이 권력이 살아 있다는 표지다.
6.6 이 통찰이 가져오는 것
세 가지를 정리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첫째, 적-친구 구도의 유혹이 언제 싹트는지 분명해진다. 위기가 닥치면 적을 만들고 싶어진다. 단순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결속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과 빠름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이 글의 분석은 명확히 보여준다. 원한의 정치가 자기 안에 들어선다. 그것이 한 번 들어서면 빠져나가기 어렵다. 그래서 위기일수록 더 의식해서 적-친구 구도를 거부해야 한다. 5장에서 본 권력이 발생하는 곳은 적이 있는 곳이 아니라 동료가 있는 자리다.
둘째,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가 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슈미트의 구도에서 갈등은 적의 출현이고 그래서 두렵다. 아렌트의 구도에서 갈등은 동료들 사이의 다름의 드러남이고 그래서 환영할 일이다. 이 글의 뜻에 공감하는 기업은 갈등을 매일 환영해야 한다. 회의실에서 의견이 부딪히는 곳, 노사가 부딪히는 자리, 부서가 부딪히는 대목. 그 부딪힘이 적대로 미끄러지지 않게 막는 일이 동료애의 핵심이다. 부딪힘 자체를 막는 것이 아니다.
셋째,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이 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 기업에서 기쁨이라는 말은 정치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정치는 늘 무거운 것, 부담스러운 것,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글의 분석은 다른 가능성을 가리킨다. 동료들과 함께 행위하는 곳, 권력이 모두에게 함께 발생하는 곳, 그곳은 사실 즐겁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기쁨, 다른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기쁨이 거기에 있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 끝내 도달하려 하는 곳은 그 기쁨의 자리다.
이제 아감벤으로 넘어갈 차례다. 아렌트가 그린 정치의 자리 — 행위·권력·이소노미·동료애 — 가 근대에 들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다음 장에서 다시 살펴본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다. 행정 자체를 새로 보는 길로.
7. 아감벤의 개입: 관리(Management)에서 제스처(Gesture)로
조르조 아감벤은 아렌트의 분석을 계승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끝까지 붙잡았던 ‘생물학적 삶(Zoe)’과 ‘정치적 삶(Bios)’의 구분을 비판하며 해체한다. 아감벤이 보기에 오늘의 위기는 단순히 노동이 행위를 대체한 데 있지 않다. 행정(Administration)이 주권을, 관리가 정치를 송두리째 사로잡은 데 있다. 아감벤은 바로의 Gerere 개념을 다시 불러낸다. 이것이 곧 현대 생명정치(Biopolitics)의 핵심 작동 원리이자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구원의 열쇠라고 보기 때문이다.
7.1 생명정치와 수용소: 행정의 끝자락
아렌트가 ‘반정치적’이라고 보았던 수용소(Camp)를, 아감벤은 근대 정치의 숨은 패러다임(Nomos)으로 규정한다.[27]
- 주권과 행정의 결탁: 현대 권력은 법을 만드는 주권적 결단(Legislative/Facere)보다 예외상태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을 관리하는 경찰적·행정적 조치(Executive/Gerere)에 더 기댄다. 수용소는 법이 적용되지 않으나 생명만은 철저히 관리되는 공간, 곧 순수한 Gerere의 공간이다.[28]
- 오이코노미아(Oikonomia): 아감벤은 기독교 신학의 삼위일체론에서 ‘치세(Reign)’와 ‘통치(Government)’가 갈라지는 지점을 추적한다. 신은 존재하나 세계를 다스리는 일은 천사들(행정가들)이 맡는다. 이 구도가 오늘의 ‘경영(Management)’ 패러다임으로 이어진다. 권력은 영광스러운 의례일 뿐 그 실질은 끝없는 관리 행위(Gerere)에 있다.[29]
아감벤이 말한 통치(Government)가 치세(Reign)를 대체한 자리를 21세기 한국이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우리 헌법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강하게 선언한다. 우리는 5년에 한 번 대통령을 뽑고 4년에 한 번 국회의원을 뽑는다. 그러나 그 모든 의례적 정당성의 표면 뒤에서, 날마다의 통치는 기재부·검찰·법제처 같은 거대한 행정 기계가 떠맡는다. 정권이 바뀌어도 행정의 흐름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치세는 바뀌어도 통치는 그대로다. 더 깊이 들어가면 검찰권의 정치화가 이 구도의 가장 뚜렷한 얼굴이다.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정치적 사건이 결국 검찰의 수사와 기소로 결판난다. 아감벤이 말한 벌거벗은 생명을 관리하는 경찰적·행정적 조치가 한국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로 살아 있다. 정치인이 정치로 답하지 못하고 검찰의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 의회가 입법으로 답하지 못하고 행정명령에 끌려가는 모습, 시민이 자기 권리를 정치적 대표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법 절차를 통해 구하는 모습 — 이 모든 모습이 통치가 치세를 잡아먹은 결과다.
7.2 제스처(Gesture): 목적 없는 수단
아감벤은 바로가 말한 Gerere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한편으로 Gerere는 장군의 행정적 수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스처(Gesture)’의 어원이기도 하다. 아감벤은 이 제스처 개념으로 목적론적 정치를 벗어날 가능성을 모색한다.[30] [31]
- 목적 없는 수단(Means Without End):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Facere는 목적(생산물)에 매이고 Agere는 흔히 정치적 목표(혁명, 법 제정)에 매인다. 그러나 제스처는 “수단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행위”다.
- 매체성의 전시: 제스처는 무엇을 생산하거나 이루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 언어와 행위 속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순수한 매체성(Pure Mediality)’을 전시한다.[32]
- 사례:
- 마임(Mime): 마임 배우가 물을 마시는 흉내를 낼 때 그는 갈증 해소라는 목적 없이 마시는 행위(수단) 자체를 보여준다. 이것이 제스처다.
- 무용: 춤은 어디로 가기 위한 걸음이 아니다. 신체의 움직임(수단) 그 자체를 누리고 전시하는 Gerere다.[33]
7.3 정치철학적 통합: 나쁜 Gerere와 좋은 Gerere
아감벤의 분석이 보여주는 바는 분명하다. 바로의 Gerere는 현대 정치의 두 얼굴을 함께 담는다.
- 행정으로서의 Gerere(The Administration): 아렌트가 비판한 ‘사회’의 통치술이다. 생명을 ‘지탱(Sustinet)’하고 관리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생명정치의 기계다. 목적을 잃은 채 헛도는 ‘공허한 수단’이다.[34]
- 제스처로서의 Gerere(The Gesture): 아감벤이 내놓는 대안적 정치다. 권력을 빼앗거나 새 법을 만드는(Facere) 것이 아니라, 기존의 법과 권력을 ‘무위(Inoperativity)’로 만드는 일이다. 시위대가 어떤 요구사항(목적) 없이 광장에 모여 그저 존재함을 드러낼 때, 그들은 행정 명령을 무력화하는 순수한 제스처를 수행한다.[35]
여기서 아감벤의 또 다른 개념에 닿는다. 좋은 Gerere가 하나의 행위를 넘어 한 사람의, 한 공동체의 삶 전체로 번지면, 삶과 그 삶의 방식이 더는 나뉘지 않는다. 아감벤은 이것을 ‘삶-의-형식(form-of-life)’이라 불렀다. 수단이 그대로 삶이 된 자리, 사는 일과 사는 방식이 한 몸이 된 삶이다. 제스처가 한 동작이라면 삶의 형식은 그 제스처로 엮인 삶 전체다. 10장에서 다루겠지만 회사가 ESG를 문서가 아니라 날마다의 양식으로 살아낼 때, ESG는 그 회사의 삶-의-형식이 된다. 부속 문서 「살아내는 숨결」에서 이 개념을 구체화한다.
8. 통합 비교 분석: 권력, 지배, 행정의 구조
이제 세 사상가의 개념을 엮어 권력과 지배, 행정의 구조를 하나의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8.1 개념의 대응과 변용
| 분석 범주 | 바로(Varro) | 아렌트(Arendt) | 아감벤(Agamben) | 정치철학적 함의(권력·지배·행정) |
|---|---|---|---|---|
| 만듦/내놓음 | Facere(만들다) | Work(작업) | Poiesis(목적 지향의 생산) | 입법권/기술관료제. 국가를 기계나 건축물로 보고 설계하려는 시도. 법 제정 권력. |
| 행함/실천 | Agere(행하다) | Action(행위) | Praxis(의지적 실천) | 주권/시민정치. 공론장에서의 토론, 결단, 시작. 그러나 오늘날 쇠퇴했다. |
| 떠맡음/지탱 | Gerere(떠맡다) | Labor(노동) | Gesture(제스처/관리) | 행정권/생명정치. 생명의 관리와 유지. 현대 권력의 핵심 작동 원리. |
8.2 깊이 보기: 주권의 행정화(Administratization of Sovereignty)
1. Agere의 몰락과 Gerere의 부상. 로마 공화정에서 Agere는 시민의 권리였고 Gerere는 장군의 의무였다. 그러나 제정 로마를 거쳐 근대 국가에 이르며 시민의 정치적 행위(Agere)는 투표라는 요식 행위로 쪼그라들었다. 실제 통치는 관료제적 행정(Gerere)이 독차지했다. 아렌트는 이를 ‘정치의 사회화’라 불렀고 아감벤은 ‘통치(Government)가 치세(Reign)를 대체한 것’이라 진단한다.[8] [29]
2. 행정의 본질, ‘떠받침(Sustinet)’. 바로는 장군이 상황을 ‘지탱(sustinet)’한다고 했다. 현대 국가는 국민의 삶을 ‘지탱’하는 일을 유일한 정당성으로 삼는다(복지국가, 안보국가). 풀어 말하면 국가가 국민을 먹여 살리는 거대한 가정이 된 자리다. 정치는 그 가정의 살림을 누가 더 효율적으로 떠맡을 것인가의 문제로 좁아진다. 그러나 아감벤이 지적하듯 이 ‘지탱’은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관리하는 배제와 포함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목적 없는 무한한 과정(Process)이 곧 정치다.[34]
3. 저항의 길, 무위(Inoperativity)의 제스처. 아렌트는 잃어버린 Agere(공적 행위)를 되살려 ‘시작’의 기적을 일으키려 했다. 반면 아감벤은 Agere로 돌아가는 길은 막혔거나 또 다른 함정(주권의 덫)이라 본다. 그가 내놓는 길은 Gerere의 전유다. 권력이 시민을 관리하려 들 때 시민은 그 관리의 틀 안에서 그 틀을 무력화하는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 법을 부수는 폭력이 아니다. 법이 적용되지 않는 상태로 법을 가지고 노는 일이다.[35] ‘행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제스처’라는 가벼운 유희로 바꾸는 윤리적 기획이다.[36]
4. 한국이라는 무대. 이 글의 분석은 한국이라는 시험대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압축된 산업화로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한 사회, 검찰권의 정치화로 통치가 치세를 대체한 자리가 가장 명백히 드러난 사회, 그리고 12·3 계엄으로 행정이 한순간에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가장 가까이 본 사회. 우리는 이 셋을 동시에 겪었다. 그러나 같은 사회가 광장에서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의 단편을 다시 만들어 냈다. 그 자리는 이 글에서 수행한 분석이 그럴듯한 공상이 아니라 실행 근거로 작용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자리다. 행정의 짐과 제스처의 가능성이 같은 광장에서 매일 부딪힌다. 그 부딪힘의 양상을 결정하는 것이 결국 시민의 날마다의 행위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9. 아렌트의 한계와 그 비판자들
여기까지 이 글은 아렌트에게 깊이 의지해 왔다. 그러나 한 사상가에게 그렇게 의지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가 받아 온 비판을 직시하고 거울로 삼는 일이다. 아렌트는 자기 저술을 겨눈 비판을 가장 많이 받은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 비판들을 외면하고 이 글의 분석만 끌고 가면 이 글의 호소력은 겉으로 강해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 약해진다. 그래서 결론으로 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여정을 비판자들의 시각으로 잠시 돌아보기로 한다. 이 장에서는 아렌트를 향한 네 가지 주요 비판을 정리한다. 그리고 그 비판들이 이 글의 결론에 미치는 함의를 살펴본다.
9.1 사료의 부적절함 — 홉스봄의 비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아렌트의 역사 서술 방법을 정면으로 비판했다.[37] 그가 본 아렌트는 철학자의 직관에 의지해 역사 자료를 자기 논지에 맞게 끌어다 쓰는 사람이었다. 1차 자료의 면밀한 비교, 통계적 검증, 사회사적 맥락의 재구성 같은 역사학의 기본 절차를 아렌트는 충분히 거치지 않는다. 특히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아렌트가 19세기 제국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다룬 자리에 그런 결함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홉스봄의 지적이다.
이 비판은 정당한 측면이 있다. 아렌트의 글은 학술 보고서가 아니라 이야기하기(storytelling)에 가깝다. 아렌트 자신이 그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 아렌트의 결론을 인용할 때도 같은 한계가 따라온다. 가령 이 글에서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시민의 행위가…’라고 적을 때, 그 폴리스의 모습이 정말 그러했는지를 사료로 따져 물으면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글은 폴리스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분석의 본보기로 다뤘다. 그 한계를 인정한다.
9.2 폴리스의 그림자 — 랑시에르의 비판
프랑스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더 근본적인 지점을 파고든다. 아렌트가 이상화한 폴리스가 실은 노예제·여성 배제·이방인 배제 위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38] 그리스 시민이 이소노미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말과 행위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민이 가정에서 노동을 떠맡은 노예와 여성을 보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공적 영역의 빛이라 부른 그곳은 사적 영역의 그늘에 누군가를 가둠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이 비판은 이 글을 가장 깊은 곳에서 흔든다. 이 글이 임직원공동소유기업, 즉 폴리스를 회사 안에 짓는 시도라고 한다면 랑시에르의 질문이 곧장 따라온다. 그 폴리스가 배제하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 회사를 평등한 동료들이 함께 행위하는 자리로 만든다 해도, 그 자리가 외주 노동자, 청소 노동자, 협력업체 직원처럼 회사 안에서 일하면서도 회사 밖으로 밀려나버린 사람들의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면, 우리는 한국판 폴리스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한국판 오이코스를 짓는 것이다.
이 직시 앞에서 이 글의 결론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글이 가야 할 다음 자리를 가리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임직원에 누가 들어가는가는 이 글의 다음 단계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문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직접 고용과 간접 고용, 공식 노동과 그늘 노동 — 이 모든 경계를 회사 안에서 어떻게 다루느냐가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 폴리스인지 오이코스인지를 결정한다. 이 글은 이 문제에 아직 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9.3 사회적인 것의 처리 — 번스타인의 비판
미국 철학자 리처드 번스타인(Richard J. Bernstein)은 또 다른 지점을 지적한다.[39]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정치에서 추방할 때, 그것을 누구의 영역으로 넘기는가? 아렌트의 답은 전문가의 영역에 가깝다. 빈곤·실업·복지 같은 문제는 정치적 토론이 아니라 행정적 해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번스타인은 이 답이 지식의 객관성을 가정한다고 비판한다. 어떤 빈곤 통계가 옳은지, 어떤 복지 정책이 효과적인지, 누구의 노동이 정당하게 평가되는지 — 이 모든 질문에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얽혀 있다. 그것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처리하는 순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 — 누구의 지식이 객관으로 인정되는가라는 물음 — 이 정치 밖으로 밀려난다.
이 비판은 이 글의 결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 글이 ESG 3단계 모델에서 Facere(정책·지표 만들기)를 1단계에 둘 때, 그 정책과 지표가 어떤 지식 위에서 만들어지는가는 묻지 않는다. 그저 정책 문서가 만들어진다는 사실로 1단계를 정의한다. 그러나 ESG 지표를 누가 정의하는가, 환경 비용을 누구의 관점에서 계산하는가, 노동 환경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가 — 이 모든 질문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번스타인의 비판은 이 글이 1단계 Facere 안에 숨겨진 정치를 보지 못했음을 일깨운다. 이 글이 다음 단계에서 「(행위고찰3) ESG 3단계 모델」을 발전시킬 때, 1단계의 지식 정치를 다루지 않으면 그 모델도 결국 행정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
9.4 합의 절차의 부재 — 하버마스의 비판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비판은 이 글에 가장 무거운 숙제를 던진다.[40] 아렌트의 정치는 시작과 행위는 강조하지만 합의에 이르는 절차는 흐릿하다. 아렌트의 폴리스에서 시민들은 자유롭게 말하고 행위하지만, 그 다양한 의견이 어떻게 하나의 결정으로 모이는지에 관한 분석은 충분하지 않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 공백은 치명적이다. 정치는 시작과 표현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결정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합의의 절차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담론 윤리를 자기 정치철학의 핵심에 두었다.
이 비판이 기업 경영자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까닭은 분명하다. 광장은 매일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과 표현만으로 충분한 곳이 있다. 그러나 기업은 매일 결정해야 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자리에서도 누군가는 책임지고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이 임직원공동소유기업과 노사협의회와 이사추천위원회의 자리를 짚을 때, 그곳들이 어떻게 결정에 이르는가의 절차가 비어 있으면 그 셋은 광장의 흉내에 그치고 만다. 아렌트의 시작과 행위만으로는 회사가 굴러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하버마스의 비판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다음 단계 설계에서 합의 절차의 구체화는 가장 중요한 과제다. 누가 어떤 의제를 발의할 수 있는가, 어떤 시점에 토론을 닫는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누가 어떤 책임으로 결정하는가, 그 결정을 어떻게 사후에 검토하는가 — 이 절차들이 두툼해질수록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 광장의 흉내가 아니라 기업의 실재가 된다. 한편으로 김세원이 언급했듯 아렌트는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토의나 의사소통 절차를 강조하지 않으나, 합의로 해소할 수 없는 근원적 복수성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와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기도 하다.[41] 이 글의 다음 작업은 그 두 자리 — 합의의 절차와 복수성의 보존 —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풀 것인가를 담아내야 할 것이다.
9.5 아렌트의 비판자들이 이 글에 더해주는 것
이 글의 분석은 잠정적이다. 아렌트가 자기 사유를 두고 “저의 생각은 언제나 잠정적입니다”라고 말했듯,[42] 이 글의 분석도 잠정적이다. 폴리스를 본보기로 삼은 자리, 사회적인 것을 처리한 자리, 합의 절차의 문제에서 이 글은 더 나아가야 한다. 결론이 도달한 임직원공동소유기업·거버넌스 코드·ESG 3단계 모델도 같은 자리다. 이 글의 결론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비판자들이 살펴 준 자리들 — 누가 임직원에 들어가는가(랑시에르), Facere의 지식 정치를 어떻게 다루는가(번스타인), 합의 절차를 어떻게 구체화하는가(하버마스), 사료의 한계를 어떻게 채우는가(홉스봄) — 은 이 글을 마친 이후의 미개척지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다.
그러나 이 비판이 이 글의 출발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적과 친구의 구도가 아닌 동료의 구도가 필요하고, 행정의 무게가 아닌 제스처의 가벼움이 필요하고, 명령과 복종의 수직 관계가 아닌 함께 행위하는 잠재력이 필요하다. 비판자들 자신도 그 필요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거기에 닿는가의 지점에서 그들은 아렌트와 갈라졌다. 이 글의 다음 작업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의 자리.
10. 결론: 수단 없는 수단의 정치를 향하여
이 글이 거듭 확인한 바는 이렇다. 바로의 언어학적 통찰은 현대 정치철학의 가장 첨예한 논쟁 지점과 맞물려 있다. Facere의 기술적 합리성과 Agere의 정치적 결단 사이에서,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Gerere야말로 서구 정치의 숨은 지배 원리였다. 아렌트가 우려한 ‘사회의 승리’는 곧 ‘행정적 수행(Gerere)’이 ‘자유로운 행위(Agere)’를 집어삼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감벤은 바로 그 Gerere의 개념 안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행정이 생명을 강제로 ‘떠맡아(bearing)’ 다스리는 일이라면, 제스처는 생명의 잠재력을 자유롭게 ‘드러내는(bearing)’ 일이다. 영어 단어 하나(bearing)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자리, 곧 라틴어 Gerere의 두 얼굴이다.[43]
결국 이 글이 기대고 있는 정치철학의 과제는 한 문장으로 모인다. 지배와 행정으로서의 Gerere를 어떻게 잠재력과 소통가능성으로서의 Gerere(제스처)로 바꿀 것인가. 이는 권력을 빼앗는 혁명이 아니다. 권력의 작동을 멈추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사용(Use)으로 채우는 ‘수단 없는 수단’의 정치다. 아감벤은 이것을 목적 없는 수단(Means Without End)이라 불렀으나 나는 수단 없는 수단으로 한 번 더 비틀고자 한다. 수단성마저 벗어난 수단이라는 뜻이다. 일터의 말로 옮기면 이렇다. 회사가 거버넌스를, ESG를, 윤리를 무언가를 위한 도구로 삼는 한 그것들은 끝내 행정 기계가 된다. 보고서를 위한 윤리, 평가를 위한 ESG, 통제를 위한 거버넌스. 수단성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 일들이 한낱 도구를 넘어 회사가 사는 방식 그 자체가 되는 일이다. 그때 Gerere는 무언가를 떠맡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삶이 자기를 드러내는 형식이 된다. 형식이 곧 삶이 되는 자리, 곧 form-of-life다. 이 장에서 밑그림을 그릴 거버넌스 코드와 ESG 3단계 모델이 끝내 닿으려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10.1 정치경제학과의 호응: 폴라니·슈마허·케인즈
이 글은 정치철학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글이 도달한 진단은 한 세기 전 정치경제학자들이 이미 다른 언어로 도달한 진단과 깊이 호응한다. 그 호응을 살펴 두는 일은 이 글의 결론을 더 단단히 한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2024)에서 의지한 세 사람 — 칼 폴라니, 에른스트 슈마허, 존 메이너드 케인즈 — 의 진단이 그것이다.
폴라니의 이중운동은 이 글의 분석과 가장 분명히 공명한다.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1944)에서 그린 그림은 이렇다. 19세기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한 가지 거대한 운동이었다. 시장이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disembedded) 자기 영역을 끝없이 넓혀가는 운동. 그러나 사회는 그 운동을 가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민과 노동자와 국가가 상부상조하는 사회적 관계를 지키려는 자기 보호 운동을 펼쳤다. 시장 운동과 사회 운동, 이 둘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 가는 거대한 흐름이 폴라니가 말한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이다.[44]
이 이중운동은 이 글의 행정 vs 행위 구도와 깊이 닿는다. 폴라니의 시장은 이 글의 행정/Gerere에 닿고, 폴라니의 사회는 이 글의 행위/이소노미에 다다른다. 시장이 사회를 잠식하듯 행정이 행위를 잠식한다. 그러나 그 잠식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도 같다. 사회가 시장에 응답하듯 행위가 행정에 응답한다. 같은 진단을 폴라니는 정치경제의 언어로, 아렌트는 정치철학의 언어로 풀었다. 이 글은 그 둘을 한 자리에 묶는 시도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도 이 글의 결과 깊이 맞물린다. 슈마허가 1973년에 그린 그림은 이렇다. 거대 산업이 추구하는 효율과 규모의 경제는 사람을 부품으로 떨어뜨리고 노동을 임금의 교환 수단으로 떨어뜨린다.[45] 그가 내놓은 답은 거대함을 작게 쪼개고, 인간 규모의 일터를 회복하고, 노동에서 가치를 만들어 내는 자기 표현의 자리를 되살리는 것이다. 슈마허가 말한 good work는 이 글이 말한 행위와 정확히 같은 지점에 있다. 부품이 아니라 행위자가 일하는 자리.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기업의 제1존재이유는 일터 제공이라 썼을 때, 그 일터는 슈마허의 good work가 일어나는 자리이며 동시에 아렌트의 행위가 일어나는 자리다.
케인즈의 통찰은 이 글의 시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케인즈가 『설득의 에세이』(1931)에서 거듭 짚은 점은 이것이다.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글이 개념의 기원과 본래 뜻을 다시 묻는 작업으로 시작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권력이 무엇인지, 경영이 무엇인지, 지배와 통치가 무엇인지를 누구든 너무 익숙한 틀 안에서 떠올린다.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없다. 케인즈가 1930년대 경제학에서 한 일을 나는 21세기 기업 경영에 적용해 본 셈이다.
세 사람의 진단을 한데 묶으면 이 글의 결론이 더 분명해진다. 폴라니가 말한 시장의 사회 분리, 슈마허가 말한 거대함의 인간 잠식, 케인즈가 말한 익숙한 틀의 함정 — 이 셋이 결국 아렌트가 말한 행위의 사라짐과 같은 곳을 가리킨다. 다만 가리키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폴라니는 시장과 사회 사이의 긴장으로 풀고, 슈마허는 규모의 문제로 풀고, 케인즈는 인식의 틀로 풀고, 아렌트는 활동의 위계로 푼다. 네 길이 결국 한 광장에서 만난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과 거버넌스 코드와 ESG 3단계 모델은 그 광장에서 한국 경영자가 시도하는 작은 도전이다.
이 호응을 명시하는 까닭은 이 글의 결론이 정치철학에서만 길어 올린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과 함께 길어 올린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이 글의 다음 작업 — 「(행위고찰2)」와 「(행위고찰3)」을 발전시키는 작업[46] — 에서 정치철학과 정치경제학을 조화시킬 수 있다. 한쪽 다리로만 걸으려 하면 쓰러질 수 있다.
10.2 기업이라는 거푸집: 폴리스도 오이코스도 아닌 잡종
여기까지의 분석을 기업에 적용해 보자. 기업은 가정(Oikos)도 아니고 폴리스(Polis)도 아니다. 그 둘이 한 몸에 섞여 있는 잡종이다. 이윤을 좇아야 하는 사적 영역이면서 동시에 다수의 사람이 만나 말과 행위로 자기를 드러내는 공적 영역이다. 그래서 기업 안에서도 Facere와 Agere와 Gerere의 세 층위가 동시에 작동한다. 정관과 거버넌스 규정과 전략을 짓는 일(Facere), 그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일(Agere), 날마다 윤리와 문화와 신뢰를 살아내는 일(Gerere). 이 셋은 갈라져 있어야 하고 동시에 서로 떠받쳐야 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으면 기업도 폴리스처럼 무너진다.
잡종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가정의 논리만 남으면 회사는 주인과 노예의 자리로 굳고, 폴리스의 논리만 남으면 회사는 이윤을 잃고 흩어진다. 기업은 그 둘을 한 몸에 지고 가야 하는 자리다. 그래서 기업의 권력도 한곳에 모여 있지 않다. 5장에서 보았듯 권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이소노미는 세 층위가 서로 명령하지 않고 공명할 때만 살아남는다.
거푸집을 잘 짜는 일이 곧 그 공명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공명의 조건은 분리다. 셋을 떼어 놓아야 공명할 수 있다. 그 분리와 공명의 짜임이 거푸집이다. 부속 문서 「움직이는 거푸집」은 이름 그대로 이 짜임을 다루며, ‘분리는 공명의 조건’을 2장에서 원리로 세운다.
이 진단을 두 모델로 풀어 본다. 하나는 거버넌스 코드, 다른 하나는 ESG 3단계 모델이다. 둘 다 이 글의 분석이 일터로 돌아오는 첫 자리다.
10.3 거버넌스 코드: 만들고, 행하고, 살아내는 세 자리
이 글의 분석을 기업 지배구조로 옮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삼층구조다. 기업이 만들어지고(facere), 수행하고(agere), 살아내는(gerere) 세 층위가 각기 다른 곳, 다른 사람, 다른 책임에 대응한다.
첫째 층, Facere — 이사회의 자리. 정관, 지배구조 규정, 중장기 전략, 위원회 규정, 보상 정책, 리스크 프레임워크. 이런 것들은 모두 ‘만들어진 산물(Artifact)’이다. 이사회는 이 산물을 짓는 자리다. 시인이 희곡을 쓰는 일과 같다. 이사회의 권한은 헌정적(constitutive)이다. 기업이라는 작은 정치 공동체의 헌법을 짓는 일이며, 만들어진 결과는 이사회의 행위가 끝난 뒤에도 회사에 남아 모두를 묶는 틀이 된다.
둘째 층, Agere — 경영진의 자리. 사업의 운영, 영업과 투자의 결정, 시장에서의 실행, 위기 대응. 이것은 실행 그 자체가 목적인 일이다.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듯, 경영진은 만들어진 거푸집(Facere의 산물) 안에서 매일 회사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결과물보다 행위의 질이 그날 회사의 모습을 결정한다. 경영진은 새 거푸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다. 짜인 거푸집을 정직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셋째 층, Gerere — 모든 구성원의 자리, 그러나 특히 의장과 위원회의 자리. 이사회 의장의 꾸준한 조정과 감독, 감사위원회와 리스크위원회의 모니터링, 노사협의회와 윤리·컴플라이언스의 일상 운영,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문화 그 자체. 이 모든 것은 ‘살아내는’ 일이다. 한 번 만들고 끝나지도 않고 한 차례의 실행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늘 다시 살아내야 한다. 아감벤이 말한 제스처의 자리가 여기다. 목적이 끝없는 과정 안에 녹아 있는 자리, 행위의 양식 자체가 회사의 정체가 되는 자리.
Gerere의 붕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은 건축법(Facere)의 틀 안에서 영업(Agere)했다. 그러나 매일의 안전 점검과 책임의 양식(Gerere)은 비어 있었고, 502명이 죽었다. 2014년 세월호는 항해 규정(Facere)을 갖추고 운항(Agere)했다. 그러나 안전 문화와 위기 대응의 양식(Gerere)은 비어 있었고, 304명이 죽었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는 품질 인증(Facere)을 갖춘 채 시장에 나왔다(Agere). 그러나 소비자 안전을 거듭 살아내는 양식(Gerere)은 비어 있었고,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자기 집 안방에서 죽거나 불치병을 앓게 되었다.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보잉 737 MAX는 항공안전 규정(Facere)을 갖춘 채 운항(Agere)했다. 그러나 안전 우선의 문화(Gerere)가 수익 압박에 밀려 무너지자 두 차례의 추락으로 346명이 죽었다.
다른 사례들을 얼마든지 더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름의 많고 적음이 핵심이 아니다. 유사한 패턴의 일이 거듭 일어났다는 점이 핵심이다. 사례를 찾아 이 자리에 옮겨 쓰면서 허무하고 비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를 찾는 일이 쉽다는 사실이 더욱 비탄스럽다. Facere의 화려한 규정도 Agere의 빠른 실행도, Gerere가 비어 있으면 결국 사람이 죽는다.
이 삼층의 핵심은 분리이자 동시에 상호 떠받침이다. 한 자리가 다른 자리를 잡아먹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사회가 일상 경영에 끼어들어 Agere를 하려 들면 경영진의 행위는 길을 잃는다. 경영진이 거버넌스 규정을 자기 손으로 고치려 들면 Facere의 산물이 흔들린다. Gerere가 약해지면 그 위 두 층이 아무리 단단해도 회사는 매일 조금씩 무너진다. 5장에서 본 권력론과 이소노미의 통찰이 이 분리를 떠받친다. 권력은 어느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세 자리 사이에 발생한다. 이소노미는 그 세 자리가 서로를 명령하지 않고 공명하는 관계로 짜일 때만 살아남는다.
이 삼층구조를 조문과 절차로 짠 자세한 설계는 부속 문서 「움직이는 거푸집」에 있다. 이사회(Facere)는 그 3장이, 경영진(Agere)은 4장이, 의장과 위원회(Gerere)는 5장이 받는다.
10.4 ESG 3단계 모델: 살아내는 ESG로
같은 삼층구조가 ESG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그동안 내가 본 ESG의 실패는 대부분 Facere에서 멈춘 ESG, 또는 Agere의 한 차례 캠페인으로 끝난 ESG였다. 이를 세 단계로 나눠 보면 그 실패의 자리가 분명해진다.
1단계, Facere — 만들기. ESG 전략의 선언, 행동강령(Code of Conduct)과 환경 정책의 제정, 지표의 개발, 위원회의 설치, 보고체계의 수립. 이 단계의 결과물은 모두 ‘문서로 남는 산물’이다. 많은 회사가 이 단계까지는 잘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멈춘다. 화려한 ESG 보고서를 제출하고 홈페이지에 내건다. 그러나 그것은 ESG의 시작일 뿐이다.
2단계, Agere — 행하기. 탄소 감축 활동, 다양성과 노동권의 실행, 안전과 데이터 보호의 실천, 공급망 점검, 지역사회 프로젝트. 정해진 KPI를 향해 구체적인 행동을 펼치는 단계다. 1단계의 산물이 비로소 행위의 옷을 입는 자리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ESG가 한 차례의 캠페인이나 단발 프로젝트로 끝나면 곧 일상에서 사라진다. 보고서 제출 시점이 다가올 때만 떠오르는 의례가 된다.
3단계, Gerere — 살아내기. ESG가 더는 별도의 문서나 별도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회사가 끊임없이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일하는가, 그 양식 안에 ESG가 녹아 있다. 일터의 행위 양식이 자연스럽게 ESG를 반영한다. 조직문화 자체가 지속가능성의 원리로 짜여 있다. 리더의 태도(gesture)가 말이 아니라 몸으로 ESG의 정신을 보여준다. 외부 평가가 없어도 그렇게 산다.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면 ESG가 회사의 ‘삶의 형식(form-of-life)’이 되는 자리다.
ESG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1→2→3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회사가 1단계의 산물을 자랑하면서 2단계로 채 가지 못하거나, 2단계의 캠페인을 자랑하면서 3단계의 양식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두꺼운 ESG 보고서를 발행한 같은 해에 그 회사 작업장에서 노동자가 죽는 일이 한국에서 거듭 일어났다. 보고서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보고서는 진실하게 썼을 것이다. 다만 그 보고서가 매일의 양식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미끄러짐이 일어나는 곳이 곧 이 글에서 말한 ‘나쁜 Gerere’와 ‘좋은 Gerere’가 갈리는 자리다. 같은 Gerere가 한쪽에서는 ESG를 지탱한다는 명분으로 끝없이 보고서를 찍어내는 행정 기계가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회사 전체가 한 호흡으로 살아내는 양식이 된다. 그 두 얼굴 사이의 거리가 한 회사의 모습을 결정한다.
이 두 모델은 이 글에서 길어 올린 정치철학을 그대로 적용한 시도이다. 거버넌스 코드는 권력이 발생하는 곳을 셋으로 갈라 이소노미가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시도이며, ESG 3단계 모델은 Gerere를 행정의 짐에서 제스처의 양식으로 바꾸려는 시도다. 둘 다 완성된 청사진이 아니다. 날마다 다시 짓고 다시 살아내야 하는 잠정적 거푸집이다. 자세한 설계와 실행 방안은 두 부속 문서에서 다룬다. 거버넌스 코드는 「움직이는 거푸집」이, ESG 3단계는 「살아내는 숨결」이 받는다. ESG의 1단계(Facere)는 그 3장, 2단계(Agere)는 4장, 3단계(Gerere)는 5장이다. 이 글의 자리는 그 두 문서의 사상적 토대를 다져 두는 데 있다.
11. 닫으며
분석에서 다시 나에게로
여기까지 왔다. 라틴어 세 동사에서 출발해 아렌트의 활동적 삶, 아이히만의 무사유, 권력론과 이소노미, 슈미트와의 갈림길을 거쳐 아감벤의 제스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글이 의지한 아렌트의 한계와 그 비판자들의 목소리도 들었다. 결론의 끝자락에서 폴라니·슈마허·케인즈의 정치경제학과의 호응을 묶고, 내 일터로 돌아오는 길을 두 모델의 골격으로 풀어 두었다. 그 모든 것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 다음 자리에 놓이는지 적어두지 않으면 이 글은 닫힌 글이 아니다.
가장 먼저 또렷해진 것은 기업이라는 거푸집의 정체다. 기업은 가정(Oikos)도 아니고 폴리스(Polis)도 아니다. 그 둘이 한 몸에 섞여 있는 잡종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쓴 “기업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결합한 조직”이라는 직관은 썩 괜찮은 통찰이었다. 바로와 아렌트와 아감벤을 거쳐 그 직관이 단단해졌다.
다음으로 분명해진 것은 세 층위의 구분이다. 기업이라는 거푸집 안에서도 Facere와 Agere와 Gerere는 다른 지점, 다른 사람, 다른 일을 가리킨다. 거버넌스 코드는 그 셋을 이사회·경영진·의장과 위원회의 자리로 풀어 본 것이다. 이 셋은 서로 갈라져 있어야 하고 동시에 서로 떠받쳐야 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으면 기업도 폴리스처럼 무너진다.
세 번째로 선명해진 것은 권력의 자리다. 권력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임직원이 함께 말하고 행위할 때 그들 사이에 잠재해 있다가 솟아나는 에너지다. 대주주의 지분도, 이사회의 의결권도, CEO의 결재권도 권력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힘이거나 권한이다. 진짜 권력은 매일 회의실에서, 노사협의회에서, 이사추천위원회의 토의에서, 일터의 복도에서,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은 그 시작의 떨림이 발생하는 진원을 회사 안에 심는 시도다.
가장 무겁게 남은 것은 Gerere의 두 얼굴이다. 같은 Gerere가 한쪽에서는 사람을 관리 대상으로 떨어뜨리는 행정 기계가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 삶의 형식을 드러내는 제스처가 된다. ESG 3단계 모델이 그 두 얼굴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본 시도다. 효율과 통제만을 좇는 Gerere는 임직원을 노동하는 동물로 떨어뜨린다. 자기의 이유로 일하는 사람의 Gerere는 같은 임직원을 시민으로 일으켜 세운다. 제도가 같아도 그 안의 사람이 Gerere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기업의 얼굴은 사뭇 달라진다.
매일의 시험
거버넌스 코드도 ESG 3단계 모델도 결국 매일의 경영 현장에서 시험대 위에 놓인다. 그것은 내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마주치는 임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다. 그들이 회사의 의사결정 과정에 자기 목소리를 낼 때, 그들이 노사협의회에서 다른 의견을 두고 부딪히고 설득할 때, 그들이 이사추천위원회에서 새 이사를 추천할 때, 그들이 공동근로복지기금의 쓰임을 두고 토론할 때, 바로 거기에서 이 글의 분석이 사실인지 거짓인지가 날마다 판가름난다. 가지런히 정리된 서고 안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와 회의실의 공기 속에서 판가름난다.
두 모델은 그 시험에서 살아남기 위한 거푸집이다. 거푸집은 매일 다시 단단해져야 하고 동시에 그 안에 살아 움직이는 행위를 채워야 모양을 갖춘다. 거푸집만 있고 행위가 없으면 빈 틀에 그치고, 행위만 있고 거푸집이 없으면 흩어진다.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둘이 함께 있도록 늘 살피는 일이 결국 경영자의 일이다.
한계 직시
쓰는 동안 거듭 흔들렸다. 아렌트는 노동을 사적 영역에 가둔다. 그러나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은 노동자가 곧 주인인 기업이다. 이 긴장을 이 한 글로 풀어낼 수 없다. 또 아렌트는 합의의 절차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은 매일 결정해야 한다. 합의가 어려운 자리에서도 누군가는 책임지고 결정해야 한다. 이 긴장도 이 한 글로 풀리지 않는다. 9장에서 본 비판자들 — 홉스봄·랑시에르·번스타인·하버마스 — 의 지적 역시 이 한 글이 다 풀어낼 수 없다. 폴라니·슈마허·케인즈와의 호응도 더 두툼해져야 한다. 더 공부해야 한다.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Jose Maria Arizmendiarrieta) 신부의 협동주의도,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공동체주의(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버넌스 코드와 ESG 3단계 모델도 잠정적이다. 거버넌스 코드의 삼층구조를 한국 중소기업의 현실에서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ESG 3단계 모델을 우리 회사의 일상 운영에서 어떤 모양으로 살아내야 하는지는 모두 별도 부속 문서에서 더 깊이 다뤄야 할 일이다. 두 부속 문서가 이 글의 옆자리에서 함께 자라야 비로소 이 글이 진정 살아 숨쉬는 글이 된다.
그날 밤 국회로 가지 못한 비겁함이 여전히 내 안에 있다. 광장에서 본 연대의 일시성과 이중성이 우리 회사 안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을 들 수 있다는 걱정이 날마다 든다. 효율과 확실성의 유혹은 날마다 새롭다. 어떤 날은 속절없이 그 유혹에 진다. 그런 날이 쌓이면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라는 모델도 거버넌스 코드도 ESG 3단계 모델도 모두 껍데기가 된다. 매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짐
그래도 가야 한다. 새로운 길을 내는 시작의 행위만이 더불어숲을 살아 있게 만든다는 믿음으로. 발자국이 길을 만든다는 믿음으로.
간디는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그런 완벽한 시스템을 찾고 있다.”[47]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모든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결국 임직원공동소유기업도 거버넌스 코드도 ESG 3단계 모델도,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그것을 살아내는 첫 자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탈고하며 적었던 한 문장을 다시 가져온다. “그래서 나는 일개 중소기업의 경영자에 불과하나 이 작은 조직에서나마 인간 소외를 극복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활력을 촉진하며, 구성원 모두가 성장의 이득을 공평히 누리도록 하는 경제적 사회적 인프라를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그 결의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한 해를 더 살아 본 지금, 그 결의를 떠받칠 사상의 토대를 한 겹 더 쌓았을 뿐이다.
다음 여정은 「(행위고찰2)」와 「(행위고찰3)」을 이 글의 곁에 두고 함께 발전시키는 일이다. 9장에서 살핀 비판들을 수용하여 다음 단계 설계와 가장 가까운 자리 — 누가 임직원에 들어가는가, Facere의 지식 정치를 어떻게 다루는가, 합의 절차를 어떻게 구체화하는가 — 를 풀어내야 한다. 정치경제학과의 호응도 더 두툼해져야 한다. 길은 멀다. 그러나 길이 멀다는 것은 이미 한 발을 내디뎠다는 뜻이다.
동료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 한나 아렌트, 『혁명론』
이 글은 다음 주요 자료들을 토대로 썼다.
- 바로의 언어 분석: [1], [3], [6], [7] (라틴어 어원 및 정의)
- 아렌트의 정치이론: [10], [2], [11], [12], [13], [20], [21] (활동적 삶의 범주, 사회의 부상, 권력론과 이소노미)
- 아렌트의 무사유 분석과 사유론: [15], [16], [17], [18], [19] (악의 평범성, 깊이 없음, 사유와 복수성)
- 슈미트와 동료애의 정치: [22], [23], [24], [25], [26] (적-친구 구도, 원한의 정치,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
- 아렌트의 한계와 그 비판자들: [37], [38], [39], [40], [41], [42] (홉스봄·랑시에르·번스타인·하버마스, 잠정성)
- 정치경제학과의 호응: [44], [45] (폴라니 이중운동, 슈마허 good work)
- 아감벤의 제스처 및 생명정치: [30], [31], [36], [27], [29] (목적 없는 수단, 수용소, 행정 비판)
- 아감벤 정본 단행본: 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김상운·양창렬 옮김, 난장, 2009. 이 글의 7장 분석에 직접 의지한 텍스트. 특히 「수용소란 무엇인가?」, 「몸짓에 관한 노트」, 「정치에 관한 노트」 세 노트가 이 글의 핵심을 떠받친다.
- 아렌트 정본 단행본: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옮김, 한길사, 2017. 이 글의 3·4·5장 분석에 직접 의지한 텍스트. 특히 「제2장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폴리스와 가정경제, 사회의 발생, 권력이 발생하는 곳), 「제3·4·5장 노동·작업·행위」(활동적 삶의 위계), 「제5장 28. 권력과 현상의 공간」, 「제6장 45.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가 이 글의 핵심을 떠받친다.
- 바로 정본 및 연구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On the Latin Language, Roland G. Kent 옮김, Loeb Classical Library 333, Harvard University Press, 1938. 『라틴어론』 VI권 77~78절이 이 글 2장의 어원 분석을 떠받친다. 『라틴어론』을 한 권 분량으로 읽어 낸 연구로 Diana Spencer, Language and Authority in De Lingua Latina: Varro’s Guide to Being Roman, Wisconsin Studies in Classics,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19.
- 통합적 해석: [8] (로마의 경영과 현대 관리의 연결)
- 본 저자의 부속 문서 「(행위고찰2) 움직이는 거푸집: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거버넌스 코드를 짓다」, 「(행위고찰3) 살아내는 숨결: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ESG를 살아내다」
- 어원과 표기에 관한 저자 주: [9] (오이키아·오이코스의 의미 차이와 이 글의 표기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