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는 숨결

(행위고찰3) 살아내는 숨결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ESG를 살아내다


1. 들어가며 — 부속 문서의 자리

이 글은 본문(『권력을 공유하는 기쁨: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사상적 토대를 묻다』)의 부속 문서다. 본문 10.4절 「ESG 3단계 모델: 살아내는 ESG로」가 그려 둔 밑그림을 받아 일터의 매일이 어떠해야 하는지 풀어 쓴 글이다. 이 글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글은 「(행위고찰2) 움직이는 거푸집」 문서의 짝이다. 본문의 10.3절에서 거버넌스 코드의 골격을 그렸고 10.4절에서 ESG 3단계 모델의 골격을 그렸다. 두 절은 같은 사상의 두 얼굴이다. 「(행위고찰2) 움직이는 거푸집」이 권력의 자리를 셋으로 구분한 거버넌스 코드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를 다뤘다면, 이 글은 그 셋 — Facere·Agere·Gerere — 을 ESG 관점에서 차례로 풀어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Gerere(게레레), 곧 ESG를 매일 살아내는 일에 가장 오래 머문다. 두 부속 문서가 본문과 짝을 이룰 때 본문의 사상이 회사의 매일 안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다.

둘째, 이 글의 사상은 본문에 의지한다. 본문 5장의 권력론과 이소노미, 7장의 아감벤이 푼 제스처(Gesture), 10장 도입부의 정치경제학 호응 — 폴라니·슈마허·케인즈 — 이 이 글의 토대다. 이 글은 ESG의 E·S·G를 각각 폴라니·슈마허·아렌트(이소노미)의 통찰로 받친다. 케인즈가 짚은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는 일은 ESG를 비용의 틀에서 호흡의 틀로 옮기는 이 글의 바탕에 깔려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슈마허(E. F. Schumacher)의 good work를 이 글의 5장에서 한 층 더 깊이 다룬다. ESG의 S(사회)가 단지 노동권의 자리에서 끝나지 않고 좋은 노동의 자리로 옮겨 갈 때 슈마허의 숨결이 일터에 닿는다.

셋째, 이 글 역시 완성된 청사진이 아니라 잠정 거푸집이다. 이 글은 ESG 매뉴얼의 모범답안을 지향하지 않는다. 본문의 닫는 말에서 인용했듯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시스템은 그 안의 사람이 할 일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글 역시 (행위고찰2)처럼 매일 다시 짓고 새로 살아내야 하는 잠정의 글이다. 한국의 한 중소기업 경영자가 자기 회사의 처지에 맞게 쓴 글이라는 점에서 이 글이 유효한 범위는 좁다. 그 좁음이 한계이자 동시에 단단함이다.

인용 정책은 이렇게 둔다. 사상의 핵심을 가져올 때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이 글의 성격에 맞게 다시 풀어 썼다. 본문의 사례 — 1995년 삼풍백화점, 2014년 세월호, 옥시 가습기 살균제, 보잉 737 MAX — 는 (행위고찰2) 문서에서 이미 풀었다. 이 글은 같은 사례를 되풀이하지 않고 ESG의 맥락에 더 가까운 새 사례를 들인다. 2024년 6월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23명 사망)[1], 2022·2023·2025년 SPC 계열사의 끼임 사망 사고 세 건[2], 2025년 5월 패션업계 그린워싱 경고[3]. 이 사례들은 안전 규정과 ESG 보고서가 함께 갖춰져 있는 곳에서도 사람이 죽거나 거짓말이 자라난 곳이다. 이 차이가 ESG의 자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히 경고한다.

본문에 의지하는 부분은 절 번호로 표기한다. 각주 체계는 본문과 일관되게 짠다.

이 글과 짝을 이루는 부속 「(행위고찰2) 움직이는 거푸집」과 공유하는 어휘 — 짜임·응답·분리·비켜섬·살아내다·잠정성·Form-of-life·그린워싱·한국 중소기업 — 는 별첨 「부속 공유 용어집」에 따로 정리해 두었다. 본문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두 부속에서 자라난 어휘를 같은 뜻으로 쓰려 함이다. 살아내다와 Form-of-life는 본문에서 들여와 두 부속이 이어받았다.


2. ESG라는 거푸집 — 무엇을 살아내는 일인가

본격적인 ESG 3단계 모델을 논하기 전에 ESG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ESG의 정체를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모델이 결정된다. ESG를 컴플라이언스라고 생각하면 모델은 행정절차가 된다. ESG를 마케팅이라고 보면 모델은 기껏해야 그린워싱이 된다.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답할 때 비로소 그 모델을 살아낼 수 있다.

2.1 ESG의 정체 — 컴플라이언스도 마케팅도 아니다

한국 기업들이 ESG를 처음 도입했을 때를 돌아보면 두 가지 도드라진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컴플라이언스다. 외부 평가기관의 점수를 잘 받으려고, 공시 의무를 채우려고, 대기업 고객사의 협력업체 ESG 평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정책을 만들고 보고서를 쓴다. 이때 ESG는 해야 할 일의 목록이다.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때때로 그것을 채우는 일이 ESG다.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가 2024년 4월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공개초안을 발표했고, 코스피 상장사를 향한 단계적 ESG 공시 의무화가 진행 중이다.[4] 의무는 컴플라이언스를 강하게 만든다. 그렇게 컴플라이언스의 얼굴이 ESG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하나는 마케팅이다. 친환경·지속가능성·탄소중립 같은 말이 광고와 보도자료에 자주 등장한다. 이때 ESG는 보여 주는 일의 재료다. 그 보여주기가 실제 양식과 멀어진 대표적 사례가 그린워싱이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자료를 보면 국내 그린워싱 위반 건수는 2020년 110건에서 2023년 4,935건으로 급증했다.[5] 2025년 5월에는 자라(ZARA)·무신사·이랜드월드(스파오)·신성통상(탑텐)이 ‘에코’와 ‘지속가능’ 표기의 근거 부족으로 공정거래위원회의 경고를 받았다.[3] 어떤 회사가 ESG 보고서를 진실하게 작성했더라도 그 회사의 매일의 운영이 보고서의 원칙과 멀어질 때 그 사이에 그린워싱이 들어선다.

그러나 이 둘이 ESG의 전부가 아님은 분명하다. 컴플라이언스는 ESG를 밖에서 시키는 일로 만들고, 마케팅은 ESG를 밖에 보여 주는 일로 만든다. 둘 모두 ESG의 자리를 회사 에 둔다. 이렇게 되면 회사는 ESG에 응답하는 데 그치고 ESG를 살아내는 데 이르지 못한다. 본문 10.4절이 경고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ESG가 문서로 남는 산물에서 멈출 때 컴플라이언스에 머물고, 한 차례 캠페인에서 멈출 때 마케팅에 멈춘다. 본문에 언급한 미끄러짐이 일어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잠시 본문 6장을 기억해보자. 슈미트가 정치를 적과 친구로 구분할 때 아렌트가 마주 세운 어휘는 동료, 곧 동료애였다. ESG의 본질이 무엇인가의 물음이 여기서 한 번 더 갈린다. 한쪽에는 사회를 회사 바깥의 남 또는 심한 경우 적으로 다루는 관점이 있다. 환경 규제는 비용으로, 노동자의 요구는 남의 회사 사정으로, 시민사회의 시선은 귀찮은 훈수로 받아들인다. 다른 한쪽에는 사회를 회사가 함께 해야 할 동료로 다루는 관점이 있다. 자연, 노동자, 시민, 협력업체가 한 회사의 살림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관점이다. ESG가 살아 있는 곳은 여기다. 컴플라이언스와 마케팅의 얼굴 너머에서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 이 모두가 사회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 이 물음 아래에서만 ESG는 회사 안의 Form-of-life로 자란다.

그러므로 이 글은 새로운 자리에 ESG를 위치시키고자 한다. ESG는 회사의 에 있지 않다. 회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있다. 본문이 가져온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면 회사의 Form-of-life다. 한 번 만들고 끝나는 산물도 아니고 한 차례 펼치고 끝나는 캠페인도 아니다. 매일의 결정과 매일의 행위가 하나의 양식으로 이어져 나가는 문화, 그것이 ESG다. 이 글이 제시하는 ESG 3단계 모델은 그 양식을 매일의 현장으로 옮긴 잠정 거푸집이다.

2.2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ESG의 자리

왜 지금 ESG인가? 유럽연합이 ESG 공시를 의무화해서?[6] BlackRock의 Larry Fink가 ESG를 외쳐서?[7]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지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1980년대 이후 한 세대 넘게 세계 경제를 떠받쳐 온 신자유주의의 약속이 무너진 자리에 ESG가 들어선다.

신자유주의의 약속은 단순했다. 시장에 맡기면 된다. 기업이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면 사회 전체가 부유해진다. 환경도 노동도 분배도 시장의 가격 결정 원리가 알아서 해결해준다. 그러나 한 세대를 살아낸 결과, 약속은 허상이었음이 드러났다. 부의 편중이 심해졌고, 기후위기가 가속됐고, 노동의 자리가 좁아졌다. 시장이 사회를 포식하면서 폴라니가 이중운동으로 지목한 현상이 재현됐다. 시장의 확장이 한쪽에서 일어나면 사회의 보호 운동이 다른 쪽에서 일어난다. ESG는 그 보호 운동의 한 얼굴이다.

여기서 ESG의 정체가 선명해진다. ESG는 기업이 사회의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다. 시장이 사회를 잡아먹기만 하던 세계에서 기업이 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사회를 돌아보며 자기 역할을 다시 새기는 일. 환경의 자리에서 자기 행위의 무게를 다시 재는 일. 노동의 자리에서 자기 임직원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일. 거버넌스의 자리에서 자기 권력의 짜임을 다시 구성하는 일. 이 모든 일이 기업이 사회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ESG의 얼굴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관성은 ESG를 왜곡한다. ESG를 시장 안의 일로 다시 끌어들인다. ESG 등급이 좋은 기업은 자본 비용을 낮출 수 있다. ESG 펀드가 더 많은 돈을 끌어모은다. 점점 ESG가 돈이 되는 일로 굳는다. 그렇게 시장이 ESG를 다시 제 안으로 들인다. ESG의 정체가 기업이 사회의 자리로 돌아오는 일에서 기업이 시장에서 더 잘 살아남는 도구로 미끄러진다. 그 미끄러짐의 끝에 그린워싱이 있다.

이 글은 그 미끄러짐을 막아보려는 시도다. 1단계 Facere(파케레)의 자리에서 ESG의 헌법이 시장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게 지킨다. 2단계 Agere(아게레)의 자리에서 ESG의 행위가 한 차례 캠페인으로 그치지 않게 다잡는다. 3단계 Gerere의 자리에서 ESG가 매일의 양식으로 살아 숨 쉬도록 살핀다. 세 자리에서 함께 지킬 때 ESG는 시장으로 미끄러진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 빠져나옴이 살아내는 ESG다.

2.3 정치경제학과의 호응 — 폴라니·슈마허·아렌트

보통 ESG를 회계와 컴플라이언스 그리고 마케팅 측면에서 다룬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ESG를 정치철학 및 정치경제학의 통찰과 조응시켰다. 본문 10장을 막 읽고 온 독자에게 이 절의 앞머리는 복기다. 가볍게 지나가도 좋다. 다만 ESG를 세 사상가가 하나씩 받치는 그림은 이 절에서 처음 그린다.

첫째, 폴라니의 이중운동. 시장이 사회를 잡아먹는 자리에 사회의 보호 운동이 마주 선다. ESG의 E(환경)는 시장이 자연을 상품으로 잡아먹는 자리에 자연을 삶의 공간으로 마주 세우는 일이다. ESG의 S(사회)는 시장이 노동을 비용으로 잡아먹는 자리에 노동을 인간의 삶으로 마주 세우는 일이다. ESG의 G(거버넌스)는 시장이 권력을 소수의 소유로 잡아먹는 자리에 권력의 공유를 마주 세우는 일이다. 폴라니의 시선으로 보면 ESG는 시장이 잡아먹은 세 자리를 사회의 자리로 되찾아 오는 일이다.

둘째, 슈마허의 good work. 슈마허는 노동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일, 노동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완성하는 일, 인간이 자기중심성을 떨치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협력하는 일.[8]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노동은 good work가 된다. 셋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노동은 슈마허가 카뮈를 빌려 표현한 영혼 없는 노동[9]으로 전락한다. ESG의 S가 단지 노동권 보장이나 다양성 비율의 차원에서 끝나면 슈마허의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ESG의 S는 good work를 회사 안에 살려내는 일이어야 한다.

셋째, 아렌트의 권력과 이소노미. 본문 5장에서 길어 올린 이소노미의 통찰이 ESG에도 살아 있다. 이소노미는 통치도 복종도 없는 자리다. 위에서 다스리기만 하는 자도 아래에서 따르기만 하는 자도 없는, 동등한 자리들이 만드는 질서다. ESG의 G는 단지 사외이사의 비율이나 이사회 의장의 분리 같은 형식 지표가 차지할 영역이 아니다. 권력이 한 자리에 모이지 않고 자리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이 글과 짝을 이루는 첫 번째 부속 문서 「(행위고찰2) 움직이는 거푸집」에서 그것을 풀어 썼다. 그 흐름이 ESG의 G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ESG에서 G는 거버넌스 코드의 차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ESG의 G는 기업 권력의 자리가 사회의 자리에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묻는다. 5장 Gerere에서 그 물음에 답한다.

세 사상가의 통찰을 한데 모으면 다음과 같다. ESG는 회계 위에 만든 또 하나의 보고 항목이 아니다. 시장이 사회를 잡아먹은 자리에서 기업이 사회의 힘을 회복하는 운동의 한 형식이다. 그 회복이 good work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그 회복이 권력의 구조를 다시 짠다. 이중운동의 틀 위에서 폴라니가 환경을, 슈마허가 노동을, 아렌트가 권력을 받친다. E와 S와 G가 위대한 사상가들의 통찰과 한 자리에서 만난다.

이 만남을 모델로 만든 것이 ‘ESG 3단계 모델’이다. 다음 장부터 1단계 Facere, 2단계 Agere, 3단계 Gerere로 차례로 푼다.


3. 1단계 Facere — ESG의 헌법을 짓다

본문에서 논설한 Facere의 본질은 한 번 짓고 그 안에 사는 일이다. 헌법을 짓는 일이고, 거푸집을 짜는 일이며, 약속을 새기는 일이다. Facere를 ESG의 영역에 옮기면 ESG의 헌법을 짓는 일이 된다. ESG 전략 선언, 환경 정책, 인권 정책, 윤리 강령, 핵심 지표, 위원회 구성, 보고 체계 — 이 모든 산물이 ESG의 헌법을 이루는 조각이다.

ESG 3단계 모델의 첫 단계는 이 헌법을 짓는 단계다. 한국 기업들은 대체로 이 단계를 빠르게 통과한다. 외부 평가기관의 점검표가 있고 K-ESG 가이드라인이 있고 컨설턴트들이 모범 사례를 들고 다니는 까닭이다. 그러나 빠르게 통과한 1단계가 곧 잘 지은 1단계는 아니다. 산물을 빨리 채우는 일과 헌법을 단단히 짓는 일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3.1 무엇을 짓는가 — ESG 헌법의 산물 목록

ESG의 헌법을 이루는 산물은 보통 다음과 같이 펼쳐진다.

먼저 ESG 전략 선언이다. 회사가 ESG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밝히는 최상위의 약속이다. 자칫 선언에 그치기 쉽지만 그 선언이 매일의 의사결정에 길잡이가 된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다음으로 분야별 정책이 따라온다. 윤리경영 정책, 환경 정책, 인권 정책, 안전·보건 정책, 정보 보호 정책, 공급망 정책 등이다. 각 정책은 회사가 그 영역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약속하는 문서다. 좋은 정책은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분명히 한다. 모범적 정책의 목록을 베껴 둔 정책은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빠지기 쉽다.

세 번째로 핵심 지표(KPI)다.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보고할지를 미리 정해 두는 일이다. 탄소 배출량, 재해 발생률, 공급망 위반 건수, 다양성 비율 등이 그 안에 들어간다. 지표는 행위를 부르는 도구이자 동시에 자칫하면 행위를 지표 채우기로 전락시키는 도구다. 1단계에서는 어떤 지표를 설정할지를 신중히 정하는 일이 헌법을 단단히 짓는 일에 속한다.

네 번째로 위원회 구성이다. 본문 10.3절과 (행위고찰2) 5장에서 자세히 다뤘다. ESG에서는 이사회 산하의 지속가능경영위원회 또는 ESG 위원회가 그 역할을 맡는다. 이 위원회가 임원 명함의 한 줄을 채우는 형식 기구인지, 아니면 매일의 의사결정에 응답하는 실질 기구인지가 1단계의 단단함을 결정한다.

다섯 번째로 보고 체계다.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보고하는지, 어느 정보가 어떤 길로 위원회와 이사회에 닿는지를 미리 정해 두는 일이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의 발간 주기, 인증 기관, 외부 검증 절차 등이 여기 들어간다.

이 다섯 산물이 ESG의 헌법을 이룬다. 이것들을 한 번에 다 만들기는 어렵다. 회사의 성장 단계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산물을 더해 가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다만 한 산물을 만들 때마다 그 산물이 회사의 매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분명히 정의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물은 종이 위에만 산다.

3.2 누가 짓고 누가 비켜서는가

산물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산물의 형식이 아니라 산물을 지은 사람이다. 같은 환경 정책이라도 환경 컨설턴트가 모범 사례를 토대로 며칠 만에 도출한 문서와, 회사의 임원과 실무자들이 몇 달을 두고 토론하며 조각한 문서는 종이 위에서는 비슷해 보일지언정 그 무게가 같지 않다. 산물은 만든 사람의 숨결을 닮는다.

한국의 많은 회사들이 1단계 산물을 컨설턴트에게 맡긴다. 이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다. 빠르게 산물을 갖춰야 하는 외부 압력 — 협력업체 평가, 공시 의무, 투자자의 ESG 점검 등 — 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주에 맡긴 산물은 회사의 매일에 침투하기 어렵다. 임직원에게는 밖에서 들어온 문서로만 남기 쉽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물이 2단계 Agere로 옮겨 갈 때 행위의 옷을 입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 있다.

좋은 1단계는 외주 산물을 출발점으로 삼되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외부의 모범 사례를 참고하여 회사의 사정과 특성을 새겨 넣는다. 이 새김 작업이 1단계의 진짜 작업이다. 누가 새기는가? 경영진과 핵심 임직원이 함께 새겨야 한다. 환경 정책이라면 안전·환경 부서뿐 아니라 생산·구매·R&D 부서 임직원이 함께 짜야 한다. 인권 정책이라면 인사 부서뿐 아니라 영업·생산 부서 책임자가 함께 짜야 한다. 그래야 정책이 그 부서의 매일에 닿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 작업의 시작은 함께 만들기로 하는 약속이다. 누가 시간을 내어 어느 회의에서 어느 산물을 함께 만들지를 미리 정한다. 그 시간과 만남을 단속하는 사람이 곧 거버넌스의 의장 또는 ESG 위원회의 의장이다. (행위고찰2)에서 의장을 매일의 양식을 단속하는 사람이라 했다. ESG의 1단계에서도 의장은 함께 만들 시간을 단속한다.

3.3 한국 중소기업의 1단계 — 외부 표준의 압력과 자기 헌법 사이

한국 중소기업의 1단계 작업에는 특수한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대기업 협력업체 평가 등의 외부 압력 때문이다.

대기업의 협력업체에 들어가려고, 또는 협력업체 지위를 유지하려고 중소기업은 그 대기업의 ESG 점검표를 채워야 한다. 점검표는 대기업마다 조금씩 다르다. 같은 환경 영역에서도 어떤 대기업은 ISO 14001을, 어떤 대기업은 EcoVadis 인증을, 또 어떤 대기업은 자체 점검표를 요구한다. 한 중소기업이 다섯 개 대기업과 거래하면 다섯 개의 ESG 점검표를 채워야 하는 일이 흔하다.

이 압력이 한국 중소기업의 1단계 작업을 왜곡한다. 헌법을 짓기보다 점검표를 채우는 일에 자원이 몰린다. 한국형 ESG 가이드라인(K-ESG)이 그 압력을 줄이려는 시도이지만,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점검표이기도 하다. 점검표를 채우는 일과 ESG의 헌법을 짓는 일은 다른 일이다. 점검표를 채우는 일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 일을 ESG의 1단계라고 착각하는 일은 잘못임을 자각해야 한다.

좋은 1단계는 두 가지 일을 함께 한다. 외부 표준의 점검표에 응답하면서, 동시에 회사의 자기 헌법을 짓는다. 두 일은 상당 부분 겹친다. 점검표가 묻는 항목 대부분이 회사의 헌법에도 필요한 항목이다. 그러나 점검표에 답하는 작업은 외부 평가용 수단에 그칠 수 있는 반면, 회사의 자기 헌법을 짓는 작업은 회사의 매일에 닿는 산물을 남긴다. 같은 시간을 들여도 결과의 무게가 다르다.

이 차이는 작은 행동이 만들어낸다. 정책 한 줄을 쓸 때 그 정책을 회사의 어느 의사결정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물어보는 일. 지표 하나를 정할 때 그 지표가 회사의 어느 행위를 유도할지를 물어보는 일. 위원회 하나를 만들 때 그 위원회가 매월 몇 시간을 어떤 안건에 쓸지를 정해 두는 일. 이런 작은 행동들이 1단계의 결과물을 외부 평가용 문서가 아닌 회사의 자기 헌법으로 빚어낸다.

1단계가 견고하지 않으면 2단계, 3단계도 바로 설 수 없다. 그러나 1단계가 단단하다고 해서 2단계가 저절로 단단해지지는 않는다. 1단계와 2단계 사이에 미끄러짐이 있다. 그 미끄러짐 문제는 6장에서 다시 다룬다. 먼저 다음 장에서 2단계 Agere를 살펴보자.


4. 2단계 Agere — ESG를 행하다

본문이 푼 Agere의 본질은 행위다. 만들어 놓은 헌법이 행위로 옮아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양식이 된다. ESG의 영역에 옮기면 ESG의 헌법을 매일의 행위로 실천하는 단계가 2단계 Agere다.

1단계에서 만든 산물 — 전략 선언, 정책, 지표, 위원회, 보고 체계 — 이 회사의 의사결정과 활동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 영향이 일어나는 곳에서 ESG가 살아 움직인다.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ESG는 문서로만 존재할 뿐이다.

2단계는 1단계보다 어렵다. 1단계의 산물은 한 번 만들어 놓으면 한동안 모양을 유지한다. 2단계의 행위는 매일 다시 일으켜야 한다. 한 번 일으킨 행위가 다음 날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1단계 산물은 다시 문서고로 돌아간다.

4.1 행위가 헌법의 옷을 입기

ESG의 헌법이 매일의 행위로 옮아가는 일이 어떤 모습일까? 다음 사례들이 그 모습을 보여준다.

탄소 감축 사례.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 50% 감축이라는 약속을 1단계 정책에 새겨 놓았다고 해 보자. 이 약속이 행위의 옷을 입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신규 설비 투자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그 설비의 비용·생산성·투자회수기간만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효율과 탄소 배출량을 반드시 함께 검토한다. 신규 차량을 도입할 때 전기차 또는 하이브리드 차량을 우선 고려한다. 본사·공장의 전력 계약을 갱신할 때 재생에너지 비율을 함께 고려한다. 이런 작은 결정의 누적이 50% 감축의 약속을 행위로 옮기는 모습이다. 이 결정들이 계속 누적되지 않으면 2030년의 약속은 2029년에 갑작스러운 부담으로 돌아올 뿐이다.

인권과 노동 사례. 인권 정책에 차별 금지를 새겼다고 해 보자. 이 약속이 행위의 옷을 입는 모습은 채용·평가·승진의 매 의사결정에서 차별이 들어설 여지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차단하는 일이다. 중요 안건을 다루는 회의가 항상 남성으로만 구성되지 않는지 점검하는 일. 비정규직과 정규직 처우 사이에 부당한 차이가 있는지 점검하는 일. 외국인 노동자가 같은 안전 교육을 받는지 점검하는 일. 이런 점검이 매일·매월·매분기 일어나야 인권 정책은 비로소 행위로 옮아간다.

공급망 사례. 공급망 정책에 인권 위반·환경 위반이 있는 협력업체와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다고 하자. 이 약속이 행위의 옷을 입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신규 협력업체 등록 절차에 ESG 점검 항목이 들어 있다. 기존 협력업체와의 계약 갱신 시점에 ESG 자가진단 또는 외부 점검을 요구한다. 협력업체에서 사고나 위반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을 우리 회사 ESG 위원회에 보고하고 우리 회사는 적절한 대처를 하거나 도움을 제공하는지 확인한다.

거버넌스와 이해관계자 사례. 회사의 의사결정이 임직원·협력업체·지역사회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정한 정책이 있다고 하자. 이 약속이 행위의 옷을 입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매월 주요 의사결정 사항이 임직원에게 어떤 형식으로 알려지는지를 점검한다. 협력업체 만족도 조사를 정기적으로 시행한다. 신규 사업의 지역사회 영향 평가를 한 차례가 아니라 사업마다 진행한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한 뒤 외부 이해관계자의 피드백을 받을 창구를 마련한다. (행위고찰2)가 풀어낸 거버넌스 코드가 권력 발생의 짜임이라면, 여기서의 거버넌스 행위는 그 권력이 회사 밖의 사회와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살핀다. 같은 G이지만 보는 각도가 다르다.

각 사례에 공통된 모습이 있다. 행위는 매일·매월·매분기·매년 거듭하는 의사결정과 점검의 축적이다. 한 차례의 큰 캠페인이 아니다. 매일의 작은 의사결정에 ESG의 헌법이 한 줄씩 들어서는 일이다. 이 축적이 ESG를 살아 숨 쉬게 만든다.

4.2 언제라도 한 차례 캠페인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매일 실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많은 회사가 2단계 Agere의 영역에서 한 차례 캠페인에 그치고 마는 이유다.

대표적 예가 환경 캠페인이다. 1년에 한 번 임직원이 모여 나무를 심는다. 사진을 찍고 보도자료를 낸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사진과 함께 한 페이지가 들어간다. 그 행사 자체에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한 차례의 식수가 끝나고 다음 의사결정에서 환경에 대한 고려가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캠페인은 2단계 Agere가 아니다. 그것은 1단계 산물의 한 항목 채우기이다. 보고서 한 페이지를 채우는 일.

2022년 10월 평택 SPL 제빵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소스 교반기에 끼여 사망했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모기업인 SPC그룹은 3년간 1,000억 원의 안전 투자를 약속했다.[2] 2024년까지 520억 원을 집행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1단계의 약속이 산물(예산·계획)로 옮겨진 일이고, 일부는 2단계 행위(설비 교체, 안전 교육)로도 옮아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 년도 지나지 않은 2023년 8월 같은 SPC 계열사인 샤니 성남 공장에서 50대 여성 노동자가 반죽 기계에 끼여 사망했다. 다시 불과 1년 6개월 뒤인 2025년 5월 시흥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50대 여성 노동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사망했다.[2] 똑같은 끼임 사고였다. 평택 공장에서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일어난 사고 37건 중 15건이 끼임 사고였다는 사실이 이후에 드러났다. 더 이상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끔찍한 사건(‘사고’라 부르지 않겠다)이자 재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000억 원의 약속이 거짓말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약속의 절반 이상을 집행했다는 발표를 의심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단할 수 있지 않을까? 약속이 1단계 산물(예산·계획)에서 일부 2단계 행위(설비 교체)로 옮아갔으나, 매일의 의사결정과 점검의 영역까지 내려가지 못했다. 끼임 사고가 가장 많은 줄 알면서도 모든 끼임 위험 지점에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일 또는 작업 시 안전점검 절차를 강화하는 일이 매일의 작업장 점검의 한 항목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무엇보다 노동을 생명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ESG를 그저 형식 절차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같은 사고가 이토록 거듭 발생할 수 있을까?

본문 10.4절에서 살아내는 ESG그렇지 않은 ESG를 구분하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다. 약속과 예산만 있고 매일의 의사결정과 점검이 없으면 ESG는 한 차례 캠페인에서 멈추는 것과 다름없다. 보고서에는 그것이 자랑스러운 일로 기록될지 모르나 일터에서는 거듭해서 사고가 난다. 사람이 살려고 일하는 장소에서 일을 하다가 죽는다.

4.3 KPI의 두 얼굴 — 행위를 부르는 도구이자 떨어짐의 도구

핵심 성과 지표(KPI)는 2단계 Agere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KPI에는 두 얼굴이 있다.

좋은 KPI는 행위를 부르는 도구다. 매일 측정하고 매월 보고하는 KPI는 그 자체로 임직원의 매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안전 사고율 KPI를 매주 임원 회의에 보고하면 부서장은 매주 자기 부서의 안전을 점검할 수밖에 없다. 다양성 KPI를 매분기 이사회에 보고하면 채용 결정 때 자연히 다양성을 물을 수밖에 없다. 좋은 KPI는 이렇게 매일의 행위를 이끈다.

나쁜 KPI는 지표 채우기 도구다. 보고서에 좋은 숫자를 적으려고 측정 방식을 조정하거나, 측정 영역을 좁히거나, 측정 시점을 골라잡는 일이 일어난다. 같은 행위의 같은 결과가 측정 방식에 따라 다른 숫자로 나타난다. 그러면 지표는 행위를 이끌기는커녕 행위와 분리된 별개의 작업이 된다. 지표 채우기 작업은 누군가 따로 하고, 매일의 행위는 그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KPI를 좋은 도구로 만들고 나쁜 도구로 전락하지 않게 붙드는 일이 2단계의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살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측정의 단순함. 복잡한 지표는 조정할 여지가 많다. 단순한 지표는 조정할 여지가 적다. 100명 단위의 사망 사고율은 조정할 여지가 거의 없다. 지표가 단순할수록 거짓이 들어갈 여지가 좁아진다.

둘째, 외부 검증. 회사가 자기 측정을 자기가 검증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다. 외부 인증, 외부 감사, 협력업체와의 교차 점검이 여기에 무게를 더한다.

셋째, 질(質)의 KPI를 양(量)의 KPI 옆에 두기. 양의 KPI만 두면 슈마허가 비판한 양의 허상에 떨어지기 쉽다. 안전 교육 시간만이 아니라 안전 교육의 결과적 행동 변화를, 다양성 비율만이 아니라 다양성이 의사결정에 실제로 미친 영향을 함께 묻는다. 묻기 어렵고 측정하기 까다롭지만, 양의 KPI 옆에 질을 묻는 일이 KPI를 행위의 도구로 단단히 잡아 준다.

KPI의 두 얼굴은 5장 Gerere에서 다시 다룬다. KPI를 좋은 도구로 살리는 일은 결국 회사 전체의 매일의 양식 — Gerere — 에 속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KPI 자체의 짜임만으로는 KPI가 좋은 도구가 되지 못한다. 회사의 매일이 KPI를 살아내는 양식 안에 있을 때 KPI도 비로소 행위의 도구로 설 수 있다.

이제 다음 장에서 ESG 3단계 모델의 가장 무거운 영역, 3단계 Gerere를 살펴보자.


5. 3단계 Gerere — ESG를 살아내다

본문에서 강조한 Gerere의 본질은 꾸준한 수행이자 살아내는 양식이다. 한 번 짓는 일(Facere)도 아니고 한 차례 행하는 일(Agere)도 아니다. 매일의 결정과 매일의 호흡 안에 녹아 있는 행동 양식 그 자체다. ESG의 영역에 옮기면 ESG가 회사의 매일의 행동 양식이 되는 단계가 3단계 Gerere다.

이 단계가 ESG 3단계 모델에서 가장 무거운 단계다. 1단계의 산물도 2단계의 행위도 이 3단계 행동 양식으로 살아 숨 쉬지 못하면 결국 ESG는 문서에 그치고 만다. 자연히 이 단계가 가장 어렵다. 1단계는 짓는 작업이고 2단계는 행하는 작업이다. 둘 다 시작과 끝이 있는 작업이다. 3단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작업이다. 매일 다시 일어나야 하고 매월 다시 새겨져야 하고 매년 다시 풀어 가야 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양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5장에서 이 물음에 답을 해본다.

5.1 살아내는 일이란 무엇인가

Gerere를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비유가 본문 7장이 가져온 아감벤의 제스처(Gesture)다. 제스처는 어떤 목적에 매인 도구가 아니라, 수단 그 자체가 드러나는 행위다. 춤이 그렇다. 춤은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고, 어떤 산출물을 만들어내는 작업도 아니다. 춤은 추는 순간 그 자체로 의미를 만들어낸다. 살아내는 일도 그렇다.

ESG의 일은 살아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행위다. 외부 평가를 잘 받으려는 일도 아니고, 보고서 한 페이지를 채우려는 일도 아니다. ESG가 회사의 호흡이 되는 순간 ESG의 의미가 비로소 살아 숨 쉰다. 여기서 ESG는 도구가 아닌 양식이 된다.

어떤 회사가 매년 4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한다고 하자. 보고서는 잘 만들었다. 외부 평가도 좋다. 그러나 그 4월이 지나면 다음 4월까지 아무도 보고서를 신경쓰지 않는다. 다음 보고서를 작성할 때가 오면 다시 보고서 작성 모드가 켜진다. 일 년 중 바로 그 한두 달 ESG가 수단으로 겨우 작동한다. 나머지 열 달 ESG는 일터에 살아 있지 않다. 이것이 살아내지 못하는 ESG다.

다른 어떤 회사 역시 매년 4월 보고서를 발간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 회사에서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은 매일의 운영을 취합하여 정리하는 작업이다. 보고서를 만들려고 따로 데이터를 모으지 않는다. 매일·매월·매분기 모이는 데이터가 보고서의 재료가 된다. 보고서 발간 시점 외에도 회사의 의사결정에 ESG가 들어 있다. 보고서는 ESG의 최종 결과물이 아니다. 매일 일터의 모습을 정리해 보여주는 하나의 산물일 뿐이다. 일 년 내내 ESG가 작동한다. 이것이 살아내는 ESG다.

두 회사의 보고서가 일터의 매일에 차지하는 위상은 천양지차다. 한쪽에서 보고서는 수단이고 다른 한쪽에서 보고서는 기록이다. 이 차이가 좋은 Gerere와 나쁜 Gerere를 나눈다. 이 차이는 보고서만으로는 볼 수 없다. 그 회사의 매일을 한 달, 두 달 함께 살아 보아야 비로소 볼 수 있다.

3단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주체의 흩어짐이다. 1단계 Facere는 이사회가 맡고 2단계 Agere는 경영진이 맡는다. 주체가 명확하다. 그러나 3단계 Gerere는 누구의 몫인가? 본문은 모든 구성원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의장과 위원회라고도 덧붙인다. 두 답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Gerere가 매일의 양식이 되려면 모든 구성원이 함께 살아내야 한다. 동시에 그 양식이 흩어지지 않고 한 흐름으로 묶이려면 누군가는 그 흐름을 단속해야 한다. 의장과 위원회가 그 일을 맡는다.

이 흩어진 주체의 양상이 3단계의 어려움이자 동시에 강함이다. 어려움은 분명하다. 주체가 흩어지면 책임이 모호할 수 있다. 모두의 일은 결국 아무의 일도 아니게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강함도 분명하다. 한 사람이 살아내는 양식이 아니라 회사 전체가 살아내는 양식이 되면, 그 양식은 한두 사람이 떠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의장과 위원회의 단속이 결정적이다. 흩어진 주체가 흩어진 채로 함께 살아내는 양식을 매일 살피는 일이 의장과 위원회의 본분이다.

5.2 슈마허의 good work — 노동의 세 목적과 행정부정이론

3단계 Gerere가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상가가 슈마허(E. F. Schumacher)다. 슈마허는 노동의 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일. 둘째, 노동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완성하는 일. 셋째, 인간이 자기중심을 떨치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협력하는 일.[8]

세 목적이 함께 있을 때 노동은 good work가 된다. 셋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노동은 슈마허가 카뮈를 빌려 표현한 영혼 없는 노동[9]으로 전락한다. 이 통찰이 ESG의 S(사회)와 어떻게 만나는가?

ESG의 S는 흔히 노동권·다양성·인권 등을 다룬다. 최저임금 준수, 산업안전 기준 준수, 채용·평가·승진에서의 차별 금지, 다양성 비율 확보.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들만 충족하면 ESG의 S를 모두 만족했다고 할 수 있을까? 슈마허의 시선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이들은 슈마허의 첫째 목적(재화와 서비스 생산) 달성 과정에서 노동자의 최소한의 인간의 조건이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항목일 뿐이다. 이것들만으로는 둘째 목적(재능의 완성)과 셋째 목적(봉사와 협력)을 충분히 다룰 수 없다.

ESG의 S가 good work를 향해 나아가려면 두 가지 물음을 더 던져야 한다. 첫째, 우리 회사의 노동이 임직원의 재능을 완성하는 노동인가, 아니면 재능을 소비하는 노동인가? 둘째, 우리 회사의 노동이 임직원에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협력하는 기회를 주는가, 아니면 자기 자리만 챙기게 만드는가?

두 물음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을 때 ESG의 S가 good work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 답은 1단계의 정책이나 2단계의 KPI로는 충분히 측정하기 어렵다. 매일의 양식, 즉 3단계 Gerere 안에서 비로소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임직원의 재능을 완성하는 회사인지는 채용·교육·평가·승진의 매일의 양식에서 드러난다. 봉사와 협력의 기회를 주는 회사인지는 부서 간 협력의 매일의 양식, 외부 이해관계자와의 응답의 매일의 양식에서 드러난다.

슈마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행정부정이론(negative theory of administration)이다. 최소한의 행정으로도 잘 돌아가는 조직 구조를 찾는 것이 좋은 경영이라는 명제다.[10] 이 명제가 (행위고찰2)와 (행위고찰3)을 같은 통찰의 양쪽 얼굴로 묶어준다. (행위고찰2)의 ‘나쁜 Gerere = 행정 기계’ 비판과 슈마허의 ‘행정부정이론’이 정확히 같은 지점을 짚는다. 행정이 늘어날수록 조직은 죽고, 행정이 줄어들수록 조직이 산다는 통찰이다. 행정이 줄어든 빈자리에 사람의 good work가 들어선다.

ESG의 3단계 Gerere에 슈마허의 행정부정이론을 적용해 보자. ESG가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새로운 문서·새로운 보고서·새로운 행정 절차를 자꾸 늘리는 양상이 나쁜 Gerere다. ESG가 매일의 운영에 녹아들어 별도의 행정이 생겨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양상이 좋은 Gerere다. 슈마허의 시선으로 보면 ESG의 성공은 얼마나 많은 문서를 만들어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적은 별도 행정으로 ESG가 회사의 호흡이 되었는가에서 측정할 수 있다. 이 통찰은 슈마허의 good work가 ESG의 G(거버넌스)에도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좋은 거버넌스는 최소한의 행정으로도 잘 돌아가는 구조여야 한다.

슈마허는 같은 책에서 간디를 빌려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고 한숨짓는다. 시스템은 그 안의 사람을 대신하지 못한다. ESG 매뉴얼이 아무리 두툼해도 그 매뉴얼을 살아내는 사람이 없으면 매뉴얼은 종이일 뿐이다.

슈마허는 이어서 스콧배더(Scott Bader)사의 사례를 든다.[11] 어니스트 배더(Ernest Bader)가 자기 회사 지분의 대부분을 직원조합에 귀속시키고 직원 의회가 주권 단체가 되도록 설계한 회사다. 본문에 언급한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사상적 토대가 정확히 여기에서 출발했다. 슈마허가 정치경제학의 차원에서 그린 작은 조직·소유의 공유·good work의 통찰이 본문이 논한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밝힌다.

5.3 누가 그 울타리 안에 있는가 — 랑시에르의 그늘

슈마허의 good work는 한 가지를 말없이 전제한다. 노동자가 회사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전제다. 재능을 완성하는 자리도, 서로 봉사하고 협력하는 자리도 회사가 ‘우리’ 임직원으로 인식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스콧배더가 직원을 주권자로 세운 일도 그 직원의 울타리를 세운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누가 그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가?

본문 9.2절이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를 빌려 던진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아렌트가 그린 폴리스는 노예와 여성과 이방인을 보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시민이 광장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행위하는 동안, 그 시민의 살림을 떠받친 노예와 여성은 가정의 그늘에 머물렀다. 회사 안에 평등한 동료의 자리를 짓는다 해도, 그 자리가 외주·파견·이주 노동의 그늘을 밟고 서 있다면 우리가 짓는 것은 폴리스가 아니라 또 하나의 오이코스다. 「(행위고찰2) 움직이는 거푸집」 6.3절이 이 물음을 거버넌스의 자리에서 받아 정규직과 비정규직, 직접고용과 간접고용, 협력업체의 경계로 풀었다. ESG의 S에서는 같은 물음이 한층 더 무거워진다. ESG의 S가 회사 안 임직원의 good work만 묻고 회사가 ‘임직원’으로 세지 않은 사람의 노동을 묻지 않으면, 그 S는 슈마허의 good work에 닿기 전에 랑시에르의 그늘에서 먼저 무너진다.

이 무너짐을 가장 참혹하게 보여준 자리가 아리셀이다. 2024년 6월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로 23명이 죽었다. 그 가운데 18명이 이주노동자였고, 20명이 파견근로자였다.[1] 회사는 인력업체를 통해 이들을 불법으로 파견받아 안전교육도 없이 고위험 공정에 배치했다. 비상구로 향하는 길목에는 정규직만 열 수 있는 문이 있었다. 회사가 ‘우리 사람’으로 센 자와 세지 않은 자 사이의 경계가, 생사를 가르는 동선에서 상징이 아닌 실물의 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참담하다. 랑시에르가 말한 몫 없는 자들의 자리가 이보다 선명할 수 없다. 이들은 회사가 ‘우리 임직원’을 헤아릴 때 그 셈에 처음부터 들어 있지 않았다. good work의 울타리 밖, 회사가 보지 않기로 한 그늘에서 일하다 죽었다.

그러므로 ESG의 S를 살아내는 일은 회사 안 임직원의 노동을 good work로 끌어올리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누구를 그 안으로 들이는가를 매일 다시 묻는 일까지 나아가야 한다. 협력업체의 노동자, 도급과 파견의 노동자, 같은 공장에서 같은 위험을 지고 일하지만 소속이 다른 노동자. 이들이 우리 회사의 ESG가 보는 자리에 들어와 있는가? 이 물음을 미루면 ESG의 S는 울타리 안의 잘 정돈된 노동을 자랑하면서 울타리 밖의 죽음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본문 9.2절은 이 물음을 다음 단계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자리로 남겨 두었다.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 살아내는 ESG의 S는 누가 ‘우리’인가를 끊임없이 다시 묻는 일이다.

누가 ‘우리’인가를 묻는 일은 결국 누가 동료인가를 묻는 일이다. 본문 6장이 슈미트의 적-친구 구도와 아렌트의 동료 구도를 마주 세운 것을 떠올려보자. 울타리 밖의 노동자를 비용을 다투는 상대로만 보면 그들은 끝내 동료가 되지 못한다. 같은 위험을 함께 지고 일하는 동료로 보면 그들이 비로소 ESG의 S가 보는 자리로 들어온다. ESG의 S를 살아내는 일은 동료의 테두리를 매일 다시 묻고 조금씩 넓히는 일이다.

회사가 어디까지를 ‘우리 임직원’으로 끌어안는가는 그 회사가 처한 입장마다 다르다. 거래 관계, 도급과 파견의 법적 짜임과 오랜 관행, 회사의 규모와 형편을 무시할 수 없다. (행위고찰2) 6.3절이 이를 움직이는 거푸집의 취지로 풀었듯, ESG의 S도 한 번에 이 울타리를 넓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넓혀 가는 방향만은 또렷해야 한다. 그 방향을 매 분기 다시 확인하는 양식이 노사협의회와 ESG 위원회의 자리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방향을 잃은 ESG의 S는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해도 아리셀의 그 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5.4 좋은 Gerere와 나쁜 Gerere

3단계 Gerere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좋은 Gerere와 나쁜 Gerere의 구분이다. 본문 10.4절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같은 Gerere가 한쪽에서는 ESG를 지탱한다는 명분으로 끝없이 보고서를 찍어내는 행정 기계가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회사 전체가 한 호흡으로 살아내는 양식이 된다.

같은 운영이 두 얼굴을 띨 수 있다는 통찰이 핵심이다. 외부에서 보면 두 회사가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같은 ESG 위원회를 둔다. 같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한다. 같은 KPI를 측정한다. 같은 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한쪽 회사에서는 그 모든 일이 행정 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쪽 회사에서는 그 모든 일이 살아내는 양식, 곧 기업문화로 자리잡는다. 무엇이 둘을 가르는지 살펴보자.

첫째, 보고서가 운영을 따라가는가, 운영이 보고서를 따라가는가? 좋은 Gerere의 회사에서는 운영이 먼저 있고 보고서가 그것을 정리한다. 나쁜 Gerere의 회사에서는 보고서를 먼저 작성하고 운영이 그것을 채우는 시늉을 한다. 거꾸로다. 같은 보고서가 한쪽에서는 기록이고 다른 쪽에서는 목표다. 이 차이가 회사의 호흡을 정반대로 가른다.

둘째, 사고가 일어났을 때 무엇을 묻는가? 좋은 Gerere의 회사에서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왜 일어났는가?’를 먼저 묻는다. 나쁜 Gerere의 회사에서는 ‘어떻게 외부에 보고할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 5.3에서 본 아리셀을 다시 본다. 같은 사건에 숨은 얼굴이 있다. 그 화재 20일 전, 2,800여 개 전지에서 발열 경고가 있었으나 생산은 멈추지 않았다.[1] 사고 직전까지 4차례의 작은 화재가 있었다. 이 작은 신호들을 모두 외부에 보고하지 않는 선에서 처리했다. 좋은 Gerere의 회사라면 발열 경고가 처음 발생한 순간 즉시 운전을 멈추고 원인 분석을 했을 것이다. 첫 번째 작은 화재가 발생한 순간 즉시 운영을 멈추고 원인 규명과 재발방지 활동을 했을 것이다. 그 행위를 하지 않은 결과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작은 신호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한 회사의 Gerere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셋째, ESG가 비용인가, 호흡인가? 좋은 Gerere의 회사에서 ESG는 회사의 호흡이다. 호흡은 비용으로 계산할 수 없다. 나쁜 Gerere의 회사에서 ESG는 비용이다. 비용은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대상이다. 다른 비용과 우선순위를 두고 비교하는 대상이다. ESG를 비용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 비용은 언제라도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ESG가 호흡으로 자리잡으면 그것은 줄이기 어렵다. 호흡을 멈추면 죽기 때문이다.

이 세 갈림이 한 회사의 Gerere가 어느 얼굴을 하는지 결정한다. 세 갈림 모두의 뿌리는 한곳에서 만난다. (행위고찰2) 5.2에서 짚었듯이 그 뿌리는 본문 4장의 무사유 — 손익은 빈틈없이 따지되 의미는 묻지 않는 사고 — 다. 이 사고가 뿌리내린 회사에서는 보고서가 운영을 앞지르고, 사고가 났을 때 ‘왜?’보다 ‘어떻게 보고할 것인가?’가 먼저 떠오르고, ESG가 비용으로 셈해진다. 그리고 이 갈림은 밖에서 한두 차례 점검하는 것으로는 알 수 없다. 밖에서 보면 좋은 회사와 나쁜 회사가 비슷해 보일 수 있다. 한 회사의 진짜 얼굴은 매일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안다. 그래서 ESG의 3단계 Gerere는 외부 평가로는 세울 수 없다. 회사 안에서 매일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손으로만 세울 수 있다.

5.5 ESG 보고서의 두 얼굴과 그린워싱

3단계 Gerere의 얼굴을 가장 또렷이 보여주는 산물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통칭 ESG보고서)다. 한 회사의 ESG 보고서는 그 회사 Gerere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증거다. 다만 그 증거를 읽는 일이 까다롭다.

겉으로 보면 좋은 보고서와 나쁜 보고서는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데이터가 많다. 둘 다 외부 인증을 받았다. 둘 다 자랑할 만한 성과를 정리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보고서 사이에는 언제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좋은 보고서는 어디서 우리가 부족했는지를 함께 적는다. 한 해 동안 도달하지 못한 목표, 일어난 사고와 그 원인, 진행 중인 개선 작업을 솔직하게 쓴다. 좋은 보고서를 읽으면 그 회사의 진짜 모습이 보인다. 외부 이해관계자에게도 그렇고, 내부 임직원에게도 그렇다. 보고서가 곧 회사의 거울이 된다.

나쁜 보고서는 보통 자랑할 만한 성취만 적는다. 사진이 많고 인용구가 많고 수상 실적이 많다. 그러나 회사가 어디서 부족했는지, 어디서 실수했는지, 어디서 사람이 다쳤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또는 있더라도 처리된 일로 간결히 정리되어 있다. 나쁜 보고서에서는 그 회사의 진짜 모습을 읽어낼 수 없다. 보고서가 보여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보고서 형식의 차이가 아니라 Gerere의 차이다. 좋은 Gerere의 회사에서 보고서는 회사의 실제 호흡을 외부에 보여주는 공명의 산물이다. 나쁜 Gerere의 회사에서 보고서는 회사 자체와는 분리된 홍보 작업이다. 분리된 작업은 결국 그린워싱으로 미끄러진다.

그린워싱은 두 곳에서 자라난다. 첫째, 사실과 다른 말이 들어간다. 둘째, 사실인 말은 있되 매일의 운영과 멀어진다. 첫째는 거짓말이고 둘째는 거리의 문제다. 사실인 말이 매일의 운영과 멀어질수록 보고서와 운영 사이의 거리가 그린워싱이 된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그린워싱 위반 건수는 2020년 110건에서 2023년 4,935건으로 급증했다.[5] 한 자릿수에서 네 자릿수로의 급증이다. 같은 기간 ESG 보고서 발간 건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ESG 보고서가 늘어난 만큼 매일의 ESG 호흡이 늘어났다면 그린워싱은 줄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ESG 보고서의 증가가 매일의 운영 변화로 충분히 옮겨 가지 않은 것이다.

2025년 5월 자라(ZARA)·무신사·이랜드월드(스파오)·신성통상(탑텐)이 공정거래위원회의 그린워싱 경고를 받은 사건이 유사한 흐름으로 읽힌다.[3] 네 회사 모두 ‘에코·지속가능’ 표기를 사용했다. 그 표기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다만 그 표기를 뒷받침할 만큼 매일의 운영이 에코·지속가능의 행위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근거 역시 없다. 표기와 운영 사이의 거리가 그린워싱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린워싱은 단순한 거짓말 문제가 아니다. 보고서와 운영의 거리 문제다. 그 거리를 줄이는 일이 좋은 Gerere의 작업이다. 그 거리가 멀어지는 일을 방치할 때 나쁜 Gerere가 자라난다.

5.6 Form-of-life로서의 ESG — 아감벤이 부르는 자리

ESG의 3단계 Gerere가 가장 깊어지면 ESG는 회사의 Form-of-life가 된다. 본문 7장이 가져온 아감벤의 표현이다. Form-of-life는 삶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형식이 곧 삶인 모습이다. 삶에서 형식이 분리되지 않는 모습. 형식이 곧 삶 그 자체인 모습.

ESG가 회사의 Form-of-life가 된다는 통찰은 ESG가 더 이상 회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회사가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ESG 위원회가 따로 모여 ESG를 논의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생산 회의에서 환경 영향을 자연히 논의하고, 인사 회의에서 다양성을 자연히 묻고, 구매 회의에서 협력업체의 인권 상황을 자연히 검토하는 일이 ESG의 Form-of-life다. ESG가 회사 운영의 모든 곳에 분리된 항목으로 추가되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회사 운영 자체의 호흡이 되는 모습.

이 모습에 도달한 한국 회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습을 향해 매일 한 발씩 옮기는 일이 ESG 3단계 모델의 진짜 작업이다. 중요한 것은 도달이 아니라 향함이다. 이를 수 없는 길이라도 그곳을 향해 매일 살아내는 일이 Form-of-life이다. 그리고 그것이 ESG의 3단계 Gerere다.

회사가 ESG에 대해 말하면 ESG는 자기 에 있는 대상이다. 회사가 ESG로 살아가면 ESG는 자기 에 있는 규범이다. ESG에 대해 말할 때 ESG는 회사가 하는 업무의 한 종류다. ESG로 살아갈 때 ESG는 회사의 호흡 그 자체다. 전자에서 후자로 가는 길이 3단계 Gerere의 길이다. Form-of-life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길은 매뉴얼로 정리하기 어렵다. 매일 좋은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다잡는 사람들이 회사 안에 있어야 ESG가 회사의 Form-of-life로 자라난다. 그렇게 다잡는 일이 매일 일어나는 회사가 곧 Form-of-life로서의 ESG다.

이 Form-of-life가 자라나는 곳은 본문 5장에서 살펴본 이소노미다. 이소노미는 통치도 무정부도 아닌, 자리들의 동등성이 만드는 세 번째 자리였다. 한 회사가 ESG를 매일 살아내는 일이 가능해지려면 회사 안의 자리들이 그 동등성 위에 짜여 있어야 한다. 환경 영향에 관한 한 임직원의 발견이 위원회의 의제 옆에 같은 무게로 놓이는 자리, 협력업체 인권의 작은 신호가 영업의 결정과 같은 무게로 다뤄지는 자리, 작업장의 안전 한 단계가 분기 실적과 같은 무게로 단속되는 자리. 이 동등성이 깔리지 않으면 ESG가 어떤 형식을 갖추든 결국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밖에 보여 주는 일로 굳는다. Form-of-life는 명령으로 자라지 않는다. 자리들이 서로 동등할 때만 함께 호흡하며 자란다.

이 동등성이 막는 것이 곧 본문 4장에서 설명한 무사유다. 5.4에서 보았듯 나쁜 Gerere의 뿌리에는 손익만 따지고 의미는 묻지 않는 사고방식이 있다. 자리들이 동등하지 않은 곳에서는 누구도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되묻지 않는다. 상부에서 정한 항목만 처리하는 데 그친다. ESG를 Form-of-life로 살아내는 일이 곧 그 무사유를 매일 막는 일이다.

이 모습 안에서 1단계와 2단계도 새롭게 보인다. ESG의 헌법은 헌법을 짓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회사의 매일에 녹아들 때 산다. ESG의 행위는 행위로 일어나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매일의 양식으로 뿌리내릴 때 산다. 모든 길이 3단계로 흐른다. 그래서 3단계 Gerere는 ESG 3단계 모델의 마지막 단계이자 동시에 모든 단계가 향하는 목적지다.

다음 장에서는 1→2→3 단계 사이의 함정들을 살펴본다. 각 단계를 아무리 단단하게 설계해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사이에서 미끄러져 버리면 모델이 무너진다.


6. 1→2→3 단계 사이의 함정

ESG 3단계 모델을 단계별로 잘 만들어도 각 단계 사이의 통로가 막히면 전체의 관점에서 모델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5장 마무리에서 지적했듯 모든 길이 3단계로 흐른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하지 않다. 단계 단계 사이마다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함정,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함정, 그리고 3단계에 도달한 회사조차 다시 1단계로 미끄러지는 함정. 이 세 함정을 차례로 살펴본다.

세 함정에는 공통의 뿌리가 있다. 함정은 완성이라는 환상에서 비롯한다. 1단계 산물을 완성했다고 믿는 순간 2단계로 넘어가는 길에 걸림돌이 생겨난다. 2단계 행위를 완성했다고 믿는 순간 3단계로 나아가는 길이 사라진다. 3단계 행위 양식을 완성했다고 믿는 순간 다시 1단계로 미끄러진다. 본문 결론부의 그 한마디가 이 환상을 깨뜨리는 경종이다.

6.1 헌법에서 행위로: 1→2 사이의 함정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ESG 헌법의 산물은 갖췄지만 그 헌법이 매일의 행위로 옮아가지 않는 주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외주의 함정. 1단계 산물을 오직 외부의 컨설턴트에게만 의존해 만들었다면 그 결과물이 회사의 매일에 침투하기 어렵다. 그저 전문가가 작성한 그럴듯한 문서로 남는다. 임직원이 그 문서를 자기 일의 길잡이로 소화하지 못한다. 산물은 만든 사람의 숨결을 닮는다. 컨설턴트의 손길로만 탄생한 문서는 임직원의 행위를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이 함정을 피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외주 산물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 위에 회사의 임원과 실무자가 함께 모여 회사의 사정과 특성을 새겨 넣는 작업을 더한다. 이 작업이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는 다리가 된다.

임명의 함정. ESG 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을 임명하는 일로 1단계 작업이 끝났다고 착각하는 경우다. 담당자를 배치했으니 1단계가 끝났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다. 위원회의 매 회의 안건이 매월 어떤 의사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검토하고 모니터링하는 일에 이르러야 비로소 헌법이 행동으로 옮아간다.

이 함정을 피하는 길은 위원회 첫 회의에 있다. 이 회의에서 위원회의 작동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 위원회가 만든 정책이 사업부의 매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 그 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점검할지를 결정하는 작동 방식. 첫 회의가 보고와 의례로 끝나면 위원회는 자칫 형식 기구로 굳어버릴 수 있다.

선언의 함정. ESG 전략 선포식을 박수치며 마무리하면서 ESG가 끝났다고 착각하는 경우다. ESG 선언을 보도자료로 배포하고 홈페이지에 게시하면 1단계를 완성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선언은 말일 뿐이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으면 ESG 선언은 공허한 문서로 남을 뿐이다.

이 함정을 피하려면 기록하고 보고해야 한다. 분기 사업 보고에 그 분기에 ESG 선언을 어떤 의사결정으로 옮겼는가를 한 항목으로 두는 양식. 이를 지키면 선언이 행위의 옷을 입는다.

세 함정의 공통된 모습이 있다. 시작완성을 혼동한다는 점이다. 1단계의 산물을 완성하는 시점이 곧 2단계의 시작이다. 두 시점이 한자리에서 만나도록 짜는 일이 1→2 통로의 핵심이다.

6.2 행위에서 양식으로: 2→3 사이의 함정

가장 깊은 함정이 2→3 사이에 있다. SPC 사례가 정확히 이에 해당한다. SPC는 한 차례 사고 이후 1,000억 원의 안전 투자를 약속하고 절반 이상을 실제로 집행했다. 1단계 산물을 2단계 행위로 실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가 매일의 양식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비참하게도 유사한 사고가 거듭 발생했다. 왜일까?

한 차례 캠페인의 함정. 한 차례의 큰 행사로 행위를 충족시켰다고 착각한다. 4.2에서 언급한 환경 캠페인 사례를 떠올려보자. 그 회사는 식수 행사 한 차례로 ESG의 E를 충족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매일의 의사결정에 환경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잘 한 캠페인이라도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을 뿐이다.

이 함정을 비켜가는 길은 캠페인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렸다. 캠페인을 설계할 때 이 행사가 끝난 이후 매일·매월·매분기 어떤 작은 행위를 이어갈 것인가를 함께 설계한다. 이 후속 행위를 설계에 포함하지 않으면 행사는 공연한 일이 되기 십상이다.

KPI의 함정. 지표 채우기와 매일의 행위가 따로 벌어진다. KPI 작업이 ESG 부서의 전담 업무가 되고 매일의 운영은 그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4.3에서 별개의 작업이라 말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KPI는 매일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함정은 4.3에서 짚은 세 항목 — 측정의 단순함, 외부 검증, 질을 양 옆에 두기 — 을 통해 피할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사업부 회의에서 ESG KPI를 점검한다. 회사에 따라 ESG 전담 부서를 따로 둘 수 있다. ESG 부서는 때가 되면 KPI를 모아 경영진과 이해관계자에게 보고할 것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전담 조직이 KPI를 관리함과 동시에 사업부도 매일 회의에 KPI를 다루라는 말이다. 이 행동 양식이 매일의 행위에 KPI를 연결해 준다.

부서 분리의 함정. ESG 업무를 ESG 전담 부서만의 일이라고 한정한다. 영업·생산·R&D·구매 부서의 매일에 ESG가 없다. 이 분리가 가장 무서운 함정이다. 부서 분리가 굳어지면 ESG는 회사의 양식으로 자라지 못한다.

이 함정을 피하는 방법 역시 각 부서의 매일의 행동 양식에 있다. 구매 부서 회의에 협력업체 ESG 점검을 하나의 안건으로 상정한다. 생산 부서 회의에 환경 영향 점검을 하나의 안건으로 상정한다. R&D 회의에 지속가능성 설계를 하나의 안건으로 상정한다. ESG 부서는 각 부서 회의의 결과를 취합해 종합하고 정리한다. 모든 부서가 ESG를 매일 다룰 때 비로소 ESG가 회사에 살아 숨쉰다.

세 함정의 공통점은 분리다. 행위가 부서로 분리되고, 지표와 매일의 일이 분리되고, 행사가 이후의 일터와 분리되는 일. 이 분리들이 쌓여 2단계와 3단계 사이를 가로막는다. 함정을 피하는 방법도 하나다. 분리된 일을 매일의 운영에 새겨 넣는 일.

6.3 양식에서 다시 헌법으로: 3→1의 역행

3단계에 도달한 회사도 다시 1단계로 미끄러질 수 있다. 가장 까다로운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도달했다는 만족이 바로 그것이다.

자족의 함정. ‘우리는 ESG를 잘하고 있다’는 만족이 자만이 되는 순간 매일의 양식이 헐거워진다.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는 대형 사고 1건이 발생하기 전에 같은 원인으로 29건의 경미한 사고와 300건의 잠재적 징후(아차 사고)가 있다는 1:29:300 비율의 통계적 관찰을 말한다. 5.4에서 말했듯 작은 신호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한 회사의 Gerere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이 함정은 작은 신호를 듣는 양식을 마련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 매주 임원 회의에 작은 위반·작은 사고·작은 불만을 하나의 안건으로 상정한다. 일주일 동안 아무런 작은 문제가 없었다면 그것 자체를 하나의 점검 신호로 인식한다. 좋은 Gerere의 회사는 작은 신호를 매주 포착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일하는 곳이라면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대 교체의 함정. CEO나 임원이 바뀔 때 행동 양식이 흔들리는 현상을 말한다. 양식이 한두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으면 그 사람이 떠날 때 양식도 함께 떠난다. 5.1에서 언급한 주체의 흩어짐을 잘 체화한 회사라도 핵심 인물이 바뀌는 시점에는 그 양식이 시험대에 오른다.

이 함정은 양식을 형식으로 단단히 새겨 둠으로써 막을 수 있다. 의장의 매월 점검 양식, 위원회의 매분기 보고 양식, 사업부의 매일 점검 양식을 명문화하는 일. 사람이 바뀌어도 그 양식이 살아 있으면 새 사람이 그 양식 안에서 자기 색을 더해 갈 수 있다. (행위고찰2)에 움직이는 거푸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다. 거푸집은 사람이 떠나도 형태를 보존한다. 새 사람이 그 거푸집 안에서 다시 자라난다.

외부 변화의 함정. 시장·법규·기술의 변화가 기존 양식을 무력화한다. 2.2에서 언급한 EU CSRD와 같은 외부 변화가 한 회사의 ESG 양식을 정면으로 시험한다. 이러한 변화에 잘 대응하지 못하면 기존 양식이 새 환경에 부적합한 양식으로 굳는다.

이 함정을 피하는 방법은 1단계 헌법을 정기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것이다. 매년 또는 격년으로 1단계 산물 — 정책·지표·위원회 운영 양식 — 을 외부 환경 변화에 비추어 다시 점검한다. 이 재검토가 3단계에서 다시 1단계로 역행하는 일이 아니라 순환하는 일이 되도록 짜야 한다. 역행은 3단계에서 1단계로 미끄러지는 일이지만, 순환은 3단계를 살린 채 1단계를 정기적으로 손보는 일이다. 둘의 차이는 매일의 양식이 그 사이에 살아 있는가에 달렸다.

6.4 닫는 자리: 완성과 시작을 같이 두는 일

ESG 3단계 사이에 발생하는 함정을 살펴보았다. 함정은 늘 완성이라는 환상에서 자라난다. 1단계 산물을 완성했다는 환상, 2단계 행위를 완성했다는 환상, 3단계 양식을 완성했다는 환상. 본문 결론부의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는 한마디가 이 환상을 깨는 회초리다.

함정을 피하는 방법도 하나의 흐름으로 엮을 수 있다. 완성과 시작을 같이 두는 일. 산물을 완성하는 시점이 행위의 시작이고, 행위를 완성하는 시점이 양식의 시작이고, 양식을 완성하는 시점이 다시 1단계 점검의 시작이다. 각 단계의 이 다음 단계의 처음과 만나도록 짜는 일이 함정을 피해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다음 7장에서는 한국의 중소기업이라는 특수한 입장에서 이 모델이 어떻게 변형되는지 살펴본다. 작은 규모, 짧은 역사, 가족 경영의 그림자, 대기업 협력업체 관계가 한 지점에서 맞물린다.


7. 한국 중소기업의 ESG 적용

지금까지 살펴본 ESG 3단계 모델을 보통의 한국 중소기업이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추상의 도식을 현실의 구체성으로 옮기다 보면 한국 중소기업의 특징들이 모델에 변형을 요구한다. 작은 규모, 짧은 역사, 가족 경영의 그림자, 대기업 협력업체 관계, 그리고 K-ESG라는 한국 고유의 외부 표준. 이런 특징들이 ESG 3단계 모델이 한국 중소기업의 현실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결정한다.

이 장에서 한국 중소기업용 모델을 다시 만들지는 않는다. 모델은 이미 2장부터 6장까지의 논의로 충분히 풀어냈다. 이 장은 그 모델이 한국 중소기업이 처한 현실 앞에서 어떤 모양으로 바뀌는지 살펴본다. (행위고찰2)의 6장이 거버넌스 코드의 변형을 다뤘다면 이 장은 ESG 3단계 모델의 변형을 다룬다.

7.1 외부 압력의 두 얼굴

한국 중소기업은 ESG 관점에서 세 종류의 외부 압력을 받는다.

첫째, 대기업 협력업체 평가. 대기업의 협력업체에 들어가거나 협력업체 지위를 유지하려면 그 대기업의 ESG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대기업마다 평가 항목이 조금씩 다르다. 한 중소기업이 여러 대기업과 거래하면 여러 종류의 평가를 동시에 받아야 한다.

둘째, 한국형 ESG 가이드라인(K-ESG). 산업통상자원부가 2021년 12월 발표하고 그 뒤 여러 차례 보완해 온 한국의 ESG 가이드라인이다. 대기업별 다양한 평가 기준을 통합·표준화하려는 시도였다. 중소기업이 직면하는 평가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셋째, 공시 의무화의 단계적 적용. 2.1에서 언급한 KSSB 공시기준이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비상장 중소기업도 거래 관계상 그 영향을 받는다.

세 압력은 양면성을 띤다. 한쪽은 유익한 얼굴이다. 외부 압력이 없었다면 한국 중소기업이 ESG에 신경을 쓸 동기 자체가 약했을 것이다. 이 압력이 1단계 Facere의 동력이 된다. 다른 한쪽은 함정의 얼굴이다. 외부 압력이 너무 강하면 ESG가 외부 평가에 응답하는 일로 굳어진다. 외부 압력을 강하게 느낄수록 6.1에서 언급한 외주의 함정과 임명의 함정에 빠질 확률이 높다.

이 양면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좋은 자세는 외부 압력을 출발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K-ESG의 점검표를 채우면서 그 점검표가 묻는 항목 하나하나를 회사가 자기 고유의 헌법을 짓는 참고 기준으로 삼는다. 점검표를 채우는 일과 헌법을 짓는 일은 다른 일이다. 같은 작업을 두 의도로 다룰 수 있다. 한국 중소기업의 ESG는 두 의도를 매번 같이 두는 자세에서 시작한다.

7.2 작은 규모의 두 얼굴

작은 규모는 ESG에서도 두 얼굴을 띤다.

먼저 작은 규모의 한계. ESG 전담 부서를 둘 여유가 없다. 정책 문서를 작성할 자원이 부족하다. 외부 평가에 대응할 시간이 모자란다. 결과적으로 외주에 의존하기 쉽다. 그 외주가 회사의 매일과 동떨어진 문서를 남긴다. 6.1의 외주의 함정이 작은 규모일수록 더 강하게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작은 규모의 강점. 작은 규모는 슈마허(E. F. Schumacher)의 good work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조건이다.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작은 회사에서 한 임직원은 자기 일의 시작과 끝을 함께 본다. 자기 손이 만든 산물이 어디로 가는지 본다. 부서 간 거리가 가깝다. 의사결정이 빠르다. 6.2의 부서 분리의 함정이 작은 규모에서는 덜 일어난다. 영업·생산·구매가 한 회의실에 모일 수 있고 한 사람이 여러 영역을 동시에 다룰 수 있다. ESG의 Form-of-life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조건이다.

두 얼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작은 규모를 한계로 생각하지 않고 기회로 인식하면 어떨까? ESG 전담 부서가 없다는 것은 약점이 아니다. 모든 부서가 ESG를 매일 다루는 양식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이다. 다만 그 양식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의장과 위원회가 매일 가다듬어야 한다. 작은 규모의 강점은 그 과정이 큰 회사보다 빨리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본문의 임직원공동소유기업과 ESG가 한 호흡으로 만난다. 본문 10장 도입부에서 짚은 슈마허의 통찰이 여기서 살아난다. 작은 조직·소유의 공유·good work. 세 통찰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곳이 한국 중소기업의 ESG가 가장 깊어질 수 있는 조건이다.

7.3 짧은 역사와 가족 경영의 그림자

한국 중소기업의 또 다른 특징은 짧은 역사와 가족 경영이다.

짧은 역사. 한국의 많은 중소기업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를 막 넘어섰다. ESG 양식이 정착할 새가 없었다. 6.3에서 언급한 세대 교체의 함정이 시험대에 오른다. 창업자에서 2세로의 승계, 또는 창업자에서 전문 경영인으로의 전환이 ESG 양식의 첫 시험이 된다.

그러나 짧은 역사는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양식이 굳어있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부터 좋은 양식을 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큰 회사라면 기존 양식을 깨고 새로 짜야 한다. 짧은 역사의 회사는 처음부터 살아내는 ESG의 원리로 양식을 지을 수 있다. 5장 Form-of-life의 방식을 처음부터 만드는 자리. 도달이 아니라 향함의 자리. 짧은 역사가 그 향함의 첫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가족 경영의 그림자. 한국 중소기업의 다수는 가족 경영이다. 거버넌스의 짜임이 가족 관계 위에 놓인다. 본문이 짚은 권력이 자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원리가 가족 관계 탓에 흐려질 수 있다. ESG의 G(거버넌스)에서 가장 큰 시험대에 오른다.

다른 한편 가족 경영은 장기 시각을 가능하게 한다. 분기 실적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다음 세대로의 승계를 의식하면 장기 결정이 자연스럽다. ESG가 본질적으로 장기 관점의 일이라는 점에서 가족 경영은 ESG와 친화적이다. 다만 그 친화성이 살아나려면 가족 관계가 거버넌스의 짜임을 흐리지 않게 지켜내야 한다. (행위고찰2)가 풀어낸 거버넌스 코드가 여기서 한 번 더 시험대에 오른다.

7.4 한국 중소기업이 ESG를 잘 살아낼 수 있는 조건

한국 중소기업의 ESG는 외부에서 보면 약점이 두드러진다. 인력 부족, 자원 부족, 외부 평가 압박, 가족 경영의 그림자. 모두 약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에서 보면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다. 한국 중소기업이 ESG를 오히려 잘 살아낼 수 있는 조건들이다.

첫째, ESG의 Form-of-life에 이르는 길이 짧다. 5.6에서 짚었듯 ESG의 Form-of-life는 ESG가 회사 운영의 호흡이 되는 모습이다. 작은 회사에서는 이 호흡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할 수 있다. 영업·생산·구매 회의가 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회사라면 ESG 안건을 거기에 넣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서 분리의 함정이 작동할 여지가 좁다.

둘째, 슈마허의 good work가 손에 닿는다. 작은 규모는 한 임직원이 자기 일의 의미를 매일 보는 자리다. 자기 일의 시작과 끝을 한 손에 잡을 수 있다. 슈마허가 비판한 영혼 없는 노동에서 멀어질 수 있다. ESG의 S가 good work의 차원으로 깊어질 수 있다.

셋째,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의 사상적 토대가 처음부터 몸에 맞는다. 본문이 그린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은 작은 조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난다. 스콧배더의 사례도 임직원 400명을 한 단위로 보았다.[11] 큰 회사가 그 모델로 가려면 여러 작은 단위로 쪼개야 한다. 한국 중소기업은 처음부터 그 작은 단위에 가까운 규모로 있다. 본문의 모델과 (행위고찰3)의 ESG 모델이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 사상적 토대의 핵심 개념인 이소노미 — 자리들의 동등성 — 가 작은 회사 안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날 수 있다.

셋이 하나의 흐름으로 모인다. 한국 중소기업의 ESG는 외부 평가의 자리에서는 약점이 있으나 살아내는 자리에서는 강점이 있다. 양쪽을 어떻게 짜느냐가 한국 중소기업의 ESG가 어떤 얼굴을 할지를 결정한다.

7.5 모범답안은 없다

이 장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특징과 ESG 적용 시 따르는 장단점을 다루었다. 그러나 한국 중소기업이라면 누구나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범용 모범답안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 답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소기업은 모두 다르다. 작은 규모라고 일반화했지만 그 안에서도 각기 규모가 다르다. 짧은 역사라는 특징을 말했지만 어떤 회사는 3대를 넘는 회사도 있고 어떤 회사는 이제 태어나는 곳도 있다. 가족 경영이라는 특징을 말했지만 이 역시 산업마다 다르다. 협력업체 관계도 다 다르다. 같은 모델이 한 회사에서는 유효하고 다른 회사에서는 무용할 수 있다.

외부 압력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작은 규모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짧은 역사를 어떻게 기회로 다룰 것인가, 가족 경영의 그림자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각 회사가 자기 사정에 맞춰 자기 양식을 짜야 한다. 다시 인용한다.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한국 중소기업의 ESG에도 완벽한 답은 없다. 매일 다시 짜야 하는 자리. 도달이 아니라 향함의 자리. 한 발씩 옮기는 자리. 그 자리가 한국 중소기업의 ESG가 자라는 양식이다.


8. 결국 사람이다 — 닫는 말

ESG 3단계 모델은 ESG라는 관점이 이익 추구가 필연인 기업이라는 특수한 조직의 활동에 어떻게 스며들어야 할지를 두고 도출한 여러 가능성 있는 제안 가운데 하나이자 잠정 거푸집이다. 3단계 모델은 1단계 Facere에서 헌법을 짓고, 2단계 Agere에서 행위로 옮기고, 3단계 Gerere에서 양식으로 살아낸다. 세 단계 사이에 함정이 있고, 함정을 피하는 방법이 있다. 이 모델은 범용이 아니다. 한국 중소기업이 처한 특수한 현실 앞에서 이 모델은 변해야 한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모델은 거푸집에 불과하다. 거푸집은 모양을 잡아줄 뿐 그 안에 내용물을 채우는 사람은 따로 있다. 모델은 사람을 대신하지 못한다.

8.1 거푸집과 사람

(행위고찰2) 거버넌스 코드를 다루면서 ‘움직이는 거푸집’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다. 거푸집은 사람이 떠나도 형태를 보존한다. 새 사람이 오면 새로 거푸집을 채운다. 거푸집이 단단하면 사람이 바뀌어도 같은 행동 양식이 남는다. 이것이 거푸집의 힘이다.

그러나 거푸집은 거푸집일 뿐이다. 거푸집을 거둬냈을 때 어떤 산물이 만들어지는지는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달렸다. 같은 거푸집이 한 회사에서는 단단한 산물을 만들고 다른 회사에서는 텅 빈 형태만 남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거푸집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 글에서 자세히 풀어 본 ESG 3단계 모델도 다르지 않다. 모델이 단단할수록 사람이 바뀌어도 ESG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모델 자체가 ESG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ESG 정책을 짓는 사람, ESG 행위를 일으키는 사람, ESG 양식을 매일 살아내는 사람. 이 사람들이 없으면 모델은 문서일 뿐이다.

8.2 슈마허의 한숨

사람들은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그런 완벽한 시스템을 찾고 있다.

슈마허는 자기 책에서 이 한마디를 인용하며 한숨을 쉬었다.[12] 본문도 결론부에서 이 한마디를 인용하며 같은 한숨을 쉬었다. 이 부속 문서도 같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ESG든 거버넌스든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든 모든 모델의 출발이고 끝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도덕론이 아니다. 매일 작업장에서 안전 절차를 빠뜨리지 않는 일. 매일 회의에서 협력업체의 부담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일. 매일 채용 결정에서 차별이 들어설 여지를 한 번 더 점검하는 일. 매일 보고서에 부족한 점을 솔직하게 쓰는 일. 이런 매일의 작은 행위가 모여 일터에 ESG라는 꽃이 자란다. 일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면 모델은 자연히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좋은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일 다시 결심해야 한다. 매일 다시 결정해야 한다. 매일 다시 실수를 인정하고 고쳐야 한다. ESG의 Form-of-life가 회사의 호흡이 되려면 그 회사 임직원 대다수가 매일 좋은 사람으로 살기를 거듭 결심해야 한다. 의장도 위원도 사업부장도 임직원도 모두 함께 그 결심을 해야 한다.

8.3 한 경영자의 다짐

이 글은 한 한국 중소기업 경영자가 쓴 글이다. 그는 정치철학자도 아니고 정치경제학자도 아니며 ESG 컨설턴트도 아니다. 매일 일터에서 사람과 부대끼며 생존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좋은 일터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 정치철학에서 사상의 토대를 빌려와 자기 회사에 ESG를 어떻게 녹여낼지를 도출한 잠정 결과물이다.

이 글이 한국의 다른 중소기업에도 닿기를 바란다. 이 글의 모델을 그대로 가져다 쓰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개별 회사가 각자의 사정에 맞춰 자기 모델을 짜는 데 참고하기를 바란다. 이 글은 기껏해야 길잡이일 뿐이다.

본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계승하고, 이 글은 본문의 사상을 뒷받침한다. 본문이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이라는 사상적 거푸집을 지었다면, (행위고찰2)는 거버넌스 코드라는 권력의 짜임을 다루었고, 이 글은 ESG라는 매일의 양식을 풀어냈다. 세 글이 한 호흡으로 한 사상을 이룬다.

그러나 세 글의 모든 모델은 매일 실천해야 비로소 살아난다. 모델을 살아내는 첫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내가 속한 조직 안에서 이 글의 모델이 살아나야 이 글이 빈말이 아니게 된다. 매일 다시 시작한다. 도달이 아니라 향함이다. 한 발씩 옮긴다.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매일 거듭 결심한다.


부록. 단계별 점검표와 기구별 행동 가이드

이 부록은 이 글이 2장부터 7장까지 풀어낸 ESG 3단계 모델을 회사의 매일에 옮길 때 곁에 둘 수 있는 실무 자료다. 이 글의 본편이 사상의 결을 풀어낸 자리라면 이 부록은 매일 가까이 두고 보는 점검 도구다. 모든 항목은 앞 장에서 길어 올렸으며 부록에 새로 더한 것은 없다. (행위고찰2)의 부록이 그 본편을 조문 형식으로 압축했다면 이 부록은 이 글을 점검표와 행동 가이드로 옮긴다.


부록 1. 단계별 점검표

1.1 1단계 Facere 점검표 — ESG 헌법 짓기

3.1에서 다룬 다섯 산물의 점검표다. 각 산물을 짓고 그 산물이 회사의 자기 헌법으로 자리잡았는지 매년 점검한다.

산물 점검 질문 경고 신호
ESG 전략 선언 매일의 의사결정에 길잡이가 되는가? 보도자료에만 등장하고 회의에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분야별 정책 “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분명한가? “하겠다”만 있고 “하지 않겠다”가 없다.
핵심 지표(KPI) 행위를 부르는 도구인가, 지표 채우기 도구인가? 측정 방식이 자주 바뀌고 보고용 숫자만 정리한다.
위원회 구성 매일의 의사결정에 응답하는 실질 기구인가? 임원 명함의 한 줄을 더하는 형식 기구로 굳었다.
보고 체계 정보가 매일·매월·매분기 흐르는가? 보고서 발간 시점에만 데이터가 모인다.

한국 중소기업의 부가 점검 (3.2와 3.3에서)

  • 회사가 자기 고유의 ESG 헌법을 만들 때 K-ESG 점검표를 참고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점검표를 채우는 일과 헌법을 만드는 일을 같은 작업으로 여기지 않는가?
  • (만약 외주를 맡겼다면) 외주 산물을 출발점으로만 두고, 임원과 실무자가 함께 회사의 사정과 특성을 새겨 넣는 작업을 더했는가?

1.2 2단계 Agere 점검표 — ESG 행하기

4.1에서 다룬 네 영역의 점검표다. 매분기 임원 회의에서 점검한다.

영역 점검 질문 경고 신호
탄소 감축 신규 설비 투자 회의에서 에너지 효율과 탄소 배출량이 검토되는가? 비용, 생산성, 투자회수 지표만 본다.
인권·노동 채용·평가·승진의 매 의사결정에서 차별 가능성이 점검되는가? 인사 결정을 성과 중심으로만 집행한다.
공급망 신규 협력업체 등록 절차에 ESG 점검 항목이 들어 있는가? 가격, 납기, 품질만 본다.
거버넌스와 이해관계자 매월 주요 의사결정 사항이 임직원에게 알려지는가? 결과를 공지하나 응답이 올라올 창구가 없다.

KPI 점검 (4.3에서)

항목 점검 질문
측정의 단순함 100명 단위 사망 사고율처럼 단순한 지표인가?
외부 검증 외부 인증·외부 감사·교차 점검을 받고 있는가?
질(質)의 KPI 양의 지표 옆에 질의 물음을 함께 두는가?

1.3 3단계 Gerere 점검표 — ESG 살아내기

5.4에서 다룬 세 갈림의 점검표다. 매주 임원 회의에서 점검한다.

기준 점검 질문 경고 신호
보고서와 실제 운영의 선후관계 먼저 운영이 있고 보고서가 그것을 정리하는가? 보고서를 먼저 작성하고 운영이 그것을 채우는 시늉을 한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중시하는 질문 “왜 일어났는가”를 먼저 묻는가? “어떻게 외부에 보고할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
ESG가 비용인가 호흡인가 호흡으로 자리잡았는가? 비용 절감의 대상으로 거론된다.

작은 신호 점검 (6.3에서)

  • 매주 임원 회의에 작은 위반·작은 사고·작은 불만을 하나의 정기 안건으로 두고 있는가?
  • 한 주 동안 아무런 신호도 포착하지 못했다면 그것 자체를 점검의 신호로 인식하는가? 하인리히 법칙 1:29:300을 기억하는가?

1.4 단계 사이의 함정 점검표

6장에서 다룬 아홉 함정의 점검표다. 매분기 ESG 위원회에서 점검한다.

통로 함정 점검 질문
1→2 외주의 함정 외주 산물 위에 임원·실무자의 새김 작업을 더했는가?
1→2 임명의 함정 위원회 첫 회의에서 위원회의 작동 방식을 결정했는가?
1→2 선언의 함정 사업보고서에 ESG 선언의 의사결정 적용 항목이 들어 있는가?
2→3 일회성 캠페인의 함정 한 차례 행사 뒤 매일·매월·매분기의 작은 행위를 함께 설계했는가?
2→3 KPI의 함정 (ESG 부서 회의가 아닌) 사업부 회의에서 ESG KPI를 점검하는가?
2→3 부서 분리의 함정 영업·생산·구매·R&D 회의에 ESG 항목을 상정하는가?
3→1 자족의 함정 작은 신호를 매주 수집하고 보고하는가?
3→1 세대 교체의 함정 매일·매월·매분기 점검 양식을 명문화했는가?
3→1 외부 변화의 함정 매년 또는 격년으로 1단계 헌법을 다시 점검하는가?

부록 2. 기구별 행동 가이드

이 글에서 다룬 ESG 3단계 모델에서 회사 안의 누가 무엇을 하는가를 설명한다. 각 기구가 매주·매월·매분기·매년 어떤 안건을 다룰지를 짚는다. 이 가이드는 개별 회사의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는 이 글에서 논한 모델을 가상의 회사 운영에 옮기는 한 예시를 보여준다.

2.1 이사회

역할 — ESG의 헌법을 짓는 자리(Facere). 매일의 ESG 운영에 끼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헌법이 흔들리는 신호가 보이면 그 신호를 받아 헌법을 다시 짠다.

주기 안건
매년 ESG 전략 선언 재검토 · 1단계 산물(정책·지표·위원회 운영 양식)을 외부 변화에 비추어 다시 점검 ·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검토와 의결
매분기 ESG 위원회의 보고를 받음 · 큰 사고·큰 위반·큰 외부 변화에 대한 응답
매월 별도 안건 없음 — 평소에는 ESG 운영에 끼어들지 않음

2.2 ESG 위원회 (지속가능경영위원회)

역할 — 1단계와 2단계와 3단계를 이어주는 자리. 이사회와 경영진 사이의 응답 통로.

주기 안건
매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초안 검토 · 다음 해 ESG 우선순위 결정
매분기 사업부의 ESG 이행 결과 검토(각 부서 회의 결과를 취합) · KPI 분기 보고 점검 · 단계 사이 함정 점검(부록 1.4) · 이사회 보고
매월 ESG 부서가 정리한 매월 운영 데이터 검토 · 작은 신호의 안건이 매주 어떻게 채워졌는지 확인

2.3 이사회 의장

역할 — 거버넌스의 매일을 가다듬는 자리(Gerere). (행위고찰2)에서 의장을 분리·의제·통로를 단속하는 사람이라 했다. ESG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주기 안건
매월 ESG 위원회 회의 안건 점검 · 이사회와 경영진 사이의 응답 통로가 막혔는지 점검 · 부서 분리의 함정이 자라고 있는지 점검
매주 작은 신호의 안건이 채워졌는지 한 차례 확인

2.4 경영진 (CEO와 사업부장)

역할 — ESG의 헌법을 매일의 행위로 옮기는 자리(Agere).

주기 안건
매년 ESG 위원회와 함께 다음 해 우선순위 정함 ·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작성 책임
매분기 분기 사업 보고에 그 분기에 ESG 선언을 어떤 의사결정으로 옮겼는가를 한 항목으로 둠 · KPI의 분기 결과를 ESG 위원회에 보고
매주 임원 회의에 작은 위반·작은 사고·작은 불만을 하나의 안건으로 둠 · 각 사업부의 매주 ESG 점검 결과를 들음

2.5 사업부 (영업·생산·구매·R&D·인사)

역할 — ESG가 회사의 Form-of-life가 되는 첫 자리. 부서 분리의 함정을 피하는 자리. 각 부서의 매일 회의에 ESG 안건을 하나라도 상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부서 매일 회의에 들어갈 ESG 안건
구매 협력업체 ESG 점검 · 신규 협력업체 등록 시 ESG 항목 · 계약 갱신 시 ESG 자가진단
생산 환경 영향 점검 · 안전 신호의 누적 · 작은 사고의 평가
R&D 지속가능성 설계 · 새 제품의 환경 영향 평가
영업 거래처와의 응답 · 고객의 ESG 요구사항
인사 채용·평가·승진의 차별 점검 · 다양성 비율 · 임직원 만족도

이 안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부서 분리의 함정이 자란다.

2.6 ESG 전담 부서 (있는 경우)

역할 — 각 부서 회의의 결과를 취합해 종합·정리한다. 사업부의 ESG 활동을 대신하는 역할이 아니다. 한국 중소기업의 경우 전담 부서를 둘 여유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전담 부서가 없어도 부서 분리의 함정이 작은 규모의 조직에서는 덜 일어나므로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주기 안건
매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 · 외부 평가·인증 대응
매분기 분기 KPI 정리 · 외부 이해관계자와의 응답 정리
매월 ESG 위원회 보고서 작성 · 외부 평가·인증 일정 관리
매주 각 부서 회의에서 다룬 ESG 안건을 취합 · 작은 신호 데이터 정리

2.7 노사협의회

역할 — 임직원의 의견이 거버넌스에 닿는 통로. (행위고찰2) 5.5에서 자세히 다뤘다. ESG와 관련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핵심이다.

  • 매분기 ESG 우선순위 협의 — 임직원이 짚는 ESG 의제와 회사가 짚는 ESG 의제를 한 자리에 둠
  • 노동 안전·인권·차별 등 S(사회) 의제의 첫 응답 통로
  • 작은 신호(작은 불만·작은 사고)가 보고 라인의 위로 올라가는 통로

닫는 말

이 점검표와 가이드는 한 한국 중소기업 경영자가 자기 회사 운영에 비추어 정리한 결과다. 회사마다 사정이 다르므로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다만 ESG 3단계 모델을 회사의 매일에 옮기는 한 예시를 보여주는 자료로 보아 주기를 바란다.

잊지 말자. 모든 점검표와 모든 가이드는 종이 위의 짜임에 불과하다. 그 짜임을 살아내는 사람이 없으면 짜임은 짜임으로 끝난다. 매주 임원 회의에 작은 신호의 안건을 두는 양식도, 사업부 회의에 ESG 안건을 두는 양식도, 결국 그곳에서 매일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손에서만 살아난다.

8장의 마지막 문장으로 부록도 닫는다.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매일 거듭 결심한다.


↩ [1]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2024년 6월 24일, 23명 사망). 사망자 23명 가운데 18명이 이주노동자였고(중국 동포 17명, 라오스 1명), 20명이 파견근로자였다. 고용노동부는 아리셀이 인력업체를 통해 외국인 비정규직을 공급받은 것을 불법 파견으로 판단했다. 회사는 이들을 안전교육 없이 고위험 공정에 투입했고, 비상구로 향하는 길목에는 정규직만 열 수 있는 문이 있었다. 박순관 대표는 2025년 9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며, 이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뒤 최고 형량이다. 화재 발생 20일 전 2,800여 개 전지에서 발열 경고가 있었으나 생산이 계속됐고, 사고 직전까지 4차례의 작은 화재가 있었다는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 [2] SPC 계열사 끼임 사망 사고 — 2022년 10월 평택 SPL 제빵공장(20대 여성, 소스 교반기), 2023년 8월 성남 샤니 제빵공장(50대 여성, 반죽 기계), 2025년 5월 시흥 SPC삼립 시화공장(50대 여성, 컨베이어 벨트). 첫 사고 뒤 SPC그룹은 3년간 1,000억 원 안전 투자를 약속했고 2024년까지 520억 원을 집행했다고 발표했다. 평택 공장에서는 2017년부터 2022년까지 37건의 사고가 있었고 그 가운데 15건이 끼임 사고였다는 사실이 이후 수사·보도 과정에서 드러났다.
↩ [3] 공정거래위원회의 패션업계 그린워싱 경고(2025년 5월). 자라(ZARA), 무신사, 이랜드월드(스파오), 신성통상(탑텐) 등이 ‘에코·지속가능’ 표기의 근거 부족으로 경고를 받았다.
↩ [4]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는 2024년 4월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공개초안」을 발표한 뒤, 의견 수렴을 거쳐 2026년 2월 26일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서 제1호·제2호」를 최종 의결·공표했다. 같은 해 2월 25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지속가능성(ESG) 공시 로드맵(안)」에 따르면, 의무 공시는 2028년(2027 회계연도)부터 연결자산총액 3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시작으로 2029년 10조 원 이상, 이후 단계적으로 코스피 전체 상장사까지 확대한다. 초기에는 거래소 공시로 운영하다 제도가 안착하면 법정 공시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이 로드맵 초안은 2026년 3월 말까지의 의견 수렴을 거쳐 확정 절차를 밟고 있어, 첫 적용 기준과 시기의 세부는 확정안에서 조정될 수 있다.
↩ [5]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그린워싱 현황 및 기업의 대응방안」, 2025년 6월.
↩ [6] 유럽연합의 기업 지속가능성 공시 지침 — Directive (EU) 2022/2464 of the European Parliament and of the Council of 14 December 2022(이하 CSRD, 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 유럽의회가 2022년 11월 10일, EU 이사회가 11월 28일 채택했고, 같은 해 12월 16일 EU 공식 저널에 게재된 뒤 2023년 1월 5일 발효됐다. 2024 회계연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되며, EU 역내 약 5만 개 대기업과 일정 규모 이상의 비EU 기업까지 환경·사회·거버넌스 정보를 유럽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ESRS, European Sustainability Reporting Standards)에 따라 공시하도록 의무화한다. 이중 중요성(double materiality) 원칙을 명문화하고 제3자 검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ESG 공시를 권장 사항에서 법적 의무로 옮긴 결정적 입법으로 평가된다. 다만 2025년 2월 EU 집행위원회가 발의한 옴니버스 I 간소화 패키지가 2026년 2월 24일 EU 이사회에서 최종 채택되고 같은 해 3월 18일 발효되면서, CSRD의 적용 대상과 보고 의무는 크게 축소되었다. ESG 공시를 법적 의무로 끌어올린 첫 입법이라는 자리는 변하지 않으나, 시장의 압력 앞에서 그 의무가 다시 줄어드는 이 흐름 역시 본문 2.2절이 짚은 미끄러짐의 한 사례다. 유럽위원회 공식 페이지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 European Commission.
↩ [7] Larry Fink (BlackRock 회장 겸 CEO), 「A Fundamental Reshaping of Finance: Larry Fink’s 2020 Letter to CEOs」, 2020년 1월 14일. 운용자산 약 7조 달러의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BlackRock의 수장이 매년 발표하는 CEO 연례 서한 가운데, 지속가능성을 BlackRock 투자 결정의 중심에 두겠다고 공식화한 문헌이다. 핵심 명제는 둘이다 — 기후 위험은 곧 투자 위험이다, 그리고 우리는 근본적인 금융 재편의 갈림길에 서 있다. BlackRock은 같은 서한에서 지속가능성 정보를 충분히 공시하지 않는 기업의 경영진·이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커진다고 명시했다. ESG가 도덕적 호소에서 자본 시장의 중심 의제로 옮겨가는 분기점이 된 문헌으로 평가된다. 원문은 BlackRock 공식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 Larry Fink’s 2020 Letter to CEOs | BlackRock.
↩ [8] E. F. 슈마허, 박혜영 옮김, 『굿 워크』, 느린걸음, 2011.
↩ [9] 알베르 카뮈의 한마디. 슈마허, 같은 책,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 [10] 슈마허, 같은 책, 「좋은 경영을 위한 안내」. 슈마허는 행정부정이론(negative theory of administration)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최고의 행정은 최소한의 행정으로도 잘 돌아가는 조직 구조를 찾는 것이다.” 같은 대목에서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닌 수백 개의 풍선이 달린 줄을 잡고 있는 아이의 비유로 작은 조직의 특성을 풀어 보인다.
↩ [11] 슈마허, 같은 책, 「좋은 경영을 위한 안내」. 1951년 어니스트 배더(Ernest Bader)가 영국의 합성수지 제조회사 스콧배더(Scott Bader)사 지분의 대부분을 공동조합에 귀속시키고 직원 의회가 주권 단체가 되도록 재편한 사례. 회사의 최고 봉급액과 최저 봉급액 사이 격차를 최대 7배로 합의했고, 임직원 400명 이상으로 성장하지 않고 새 세포로 분열하는 길을 택했다. 슈마허는 이 사례를 들어 공유된 소유와 작은 조직이라는 특성이 good work를 살리는 바탕임을 보였다.
↩ [12] 슈마허가 『Good Work』(1979) 「좋은 경영을 위한 안내」 장에서 간디의 말로 인용한 대목. E. F. 슈마허, 박혜영 옮김, 『굿 워크』, 느린걸음, 2011. 다만 이 구절은 본디 T.S. 엘리엇의 시 「Choruses from ‘The Rock’」(1934)에서 나온 표현이다. 슈마허가 간디의 말로 잘못 옮긴 듯하다.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도 이를 간디에게 돌렸다. 이 글은 슈마허의 인용을 그대로 따르되 원 출처를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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