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되는 출발선

대물림되는 출발선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 〉 '아빠의 앙가주망' 장 〉 '보육·교육' 편의 둘째 글이다. 편을 연 앞의 글 「맞이하고 기르는 일」은 책에만 싣는다. 얼굴 글이 '함께 짊어지는 일'이라는 한 마디로 짚은 대목 — 다음 세대를 기르는 일을 사회가 함께 져야 한다는 것 — 을 한 편의 논설로 파고들었다. 셋째 글 「학교는 무엇을 남기는가」가 뒤를 잇는다. 주제별 진단은 Research 〉 Theme research의 보육/교육에서 다룬다.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출간 준비 중)에 실을 글을 웹에 맞게 고쳤다. 게시일 2026-07-28.


사다리가 세습의 통로가 될 때

교육은 사다리였다. 가난한 집 아이도 공부로 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지난 세기 우리 사회를 떠받친 약속이었다. 부모가 못 배웠어도 자식은 배웠고, 그 배움이 계층의 벽을 넘게 했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

그 사다리가 뒤집혔다. 사람들은 좋은 학군을 낀 아파트에 기꺼이 웃돈을 얹는다. 소득이 높은 집일수록 아이에게 더 많은 사교육[1]을 붙인다. 나라가 해마다 내놓는 사교육비 조사가 그 간격을 보여 준다. 조사는 가구를 월소득 구간으로 나누는데, 맨 위 칸인 800만 원 이상인 집은 아이 하나에 사교육비로 매달 66만 원을 쓰고, 맨 아래 칸인 300만 원 미만인 집은 19만 원을 쓴다. 세 배 넘는 차이다. 위 칸의 집은 열에 여덟이 넘게 사교육을 붙이고, 아래 칸의 집은 절반 남짓만 붙인다. 배움의 출발선이 부모의 지갑에서 갈린다.

십 년 전쯤 나는 어느 대화를 적어 둔 적이 있다.

― 자식에게 영어를 가르쳐라.
― 왜?
― 그래야 돈을 더 잘 번다.

그때 나는 그 대화가 처연하다고 썼다. 왜 배우는지 자기의 이유가 없는 배움이 안쓰럽다고 썼다. 십 년이 지나 그 처연함은 더 짙어졌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은 처연할 뿐 아니라 정확하다. 배움은 정말로 돈을 좇아 움직인다. 돈이 배움을 사고, 그 배움이 다시 돈을 번다. 사다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나, 사다리를 오르는 발판을 이제 돈으로 산다.

사다리는 이제 세습의 통로가 되었다. 계층을 넘게 하던 도구가 계층을 물려주는 도구로 뒤집혔다. 요란한 소리도 없었다. 조용히, 그러나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이 글은 그 뒤집힘을 들여다본다. 다음 세대를 기르는 일을 저마다의 형편에만 맡길 때 어떻게 불평등이 대물림되는가? 왜 기르는 일이 한 가정의 일이 아니라 사회의 일이어야 하는가?

교육이 사적 재화가 될 때

기르는 일에는 돈이 든다. 그 자체는 흠이 아니다. 문제는 그 돈이 부모의 형편에 달려 있고, 부모의 형편이 아이의 앞날로 곧장 이어진다는 데 있다.

셈은 단순하다. 형편이 넉넉한 가정은 좋은 학군을 사고, 이름난 강사를 사고, 소수정예 교실과 사람의 품이 드는 교육을 산다. 형편이 빠듯한 가정은 그러지 못한다. 아이의 재능이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가정의 부에 따라 배움의 질이 갈린다. 갈라진 배움은 성적 격차로, 갈라진 성적은 학교 격차로, 갈라진 학교는 일자리 격차로 이어진다. 그렇게 부모의 소득이 자녀의 소득으로 이어진다. 한 국책연구원의 분석에 의하면, 부모 소득이 자녀 소득으로 대물림되는 경로의 절반을 교육이 차지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교육을 정하고, 그 교육이 자녀의 벌이를 정한다. 교육은 계층을 넘는 사다리가 아니라, 계층을 실어 나르는 물길이 되었다.

돈만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말과 책과 식탁의 대화, 세상을 대하는 몸가짐까지 함께 넘어간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그것을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이라 불렀다. 넉넉한 집 아이는 학교가 높이 사는 말씨와 태도를 집에서 미리 물려받는다. 낯선 어른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법, 제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해 본 경험, 미술관과 공연장이 낯설지 않은 몸. 빠듯한 집 아이는 그것을 학교에서 처음 만난다. 그런데 학교는 이 물려받은 밑천을 아이의 됨됨이와 실력으로 읽는다. 그 순간 대물림은 성취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래서 지갑의 간극을 메워 주는 정책만으로는 출발선을 고르게 다지지 못한다. 대물림은 통장에서 통장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몸에서 몸으로도 일어난다.

이 물길은 한 세대에 그치지 않는다. 아이는 자라서 다시 부모가 된다. 넉넉하게 배운 아이는 넉넉하게 벌어 제 아이에게 넉넉한 배움을 물려주고, 빠듯하게 배운 아이는 빠듯하게 벌어 제 아이에게 빠듯한 배움을 물려준다. 출발선의 불평등이 평생을 따라다니고, 그 평생의 불평등이 다시 다음 세대의 출발선을 벌려 놓는다. 가난이 가난을 낳고, 무력함이 무력함을 낳는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구조다. 사람이 만든 규칙이 빚은 구조다. 그래서 무겁고, 같은 까닭으로 희망이 있다. 사람이 만든 규칙은 사람이 다시 만들 수 있다.

「87년 체제의 종언 그리고 새로운 역사적 전환」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문제로 소유와 결정의 쏠림을 꼽았다. 정치에서는 민주주의를 당연히 여기면서 경제에서는 소수의 지배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순 말이다. 자산의 쏠림은 소득의 쏠림보다 깊다. 버는 몫보다 쌓인 몫이 훨씬 더 기울어 있다. 쌓인 부는 저절로 불어난다. 부가 부를 낳는다. 교육은 바로 그 쌓인 부가 자녀에게로 건너가는 다리다. 부동산으로, 학군으로, 사교육으로. 부의 쏠림이 교육을 타고 다음 세대의 쏠림으로 번진다. 그러니 교육 불평등은 경제 불평등과 다른 문제가 아니다. 같은 문제의 첫 얼굴이다.

가장 먼저, 가장 깊게 새겨진다

앞서 나는 일터의 무력함을 적었다.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곳에서 한 번도 시민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정치의 결정권 앞에서도 무력해진다고. 그 무력함이 시작되는 자리를 오래 생각해 왔다. 일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더 앞선 자리가 있다. 배움의 자리다.

아이는 제 출발선을 고르지 못한다. 어느 집에 태어날지, 어느 동네에서 자랄지, 곁에 어떤 어른이 있을지, 무엇 하나 아이가 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정할 수 없는 것들이 아이의 앞날을 크게 정한다. 소유와 결정의 쏠림이 아이의 삶에 가장 먼저 새겨지는 자리가 여기다. 아이가 아직 아무것도 스스로 정할 수 없을 때, 이미 세상은 아이의 자리를 정해 둔다. 가장 깊게 새겨지는 자리도 여기다. 어린 시절에 벌어진 간격은 좀처럼 좁히기 어렵다. 뒤늦게 따라잡으려 해도 앞선 자리에서 출발한 아이는 그새 더 멀리 가 있다. 벌어진 간격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는 그 간격이 벌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팬데믹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던 몇 해, 아이들은 집에서 홀로 화면을 보며 배웠다. 곁에서 도와줄 어른이 있던 아이와 없던 아이 사이에 배움의 골이 벌어졌다. 재난은 모두에게 닥쳤으나 결과는 형편에 따라 갈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삼 년마다 치르는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우리 아이들의 평균 성적은 늘 세계 상위권이다. 그러나 같은 평가에서, 부모의 형편에 따라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성취 격차는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넓어지는 축에 든다. 성취의 평균은 높고 간격은 크다. 이 둘을 함께 보아야 우리 교육의 실상이 보인다.

우리 사회의 계층 이동은 예전만 못하다. 부모의 자리가 자녀의 자리를 정하는 힘이 한 세대 만에 눈에 띄게 커졌다는 진단이 나온다. 노력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도 함께 약해진다. 사람들이 그 믿음을 버리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다. 사다리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놓이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약해지면 사회는 더 위태로워진다. 제 힘으로 삶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결정해 주겠다는 강한 손을 반긴다. 그렇게 민주주의가 안에서부터 비워진다.

기술은 중립이나 소유는 중립이 아니다

여기에 새 변수가 하나 끼어든다. 답을 내주는 기계다. 앞의 글에서 나는 이 기계가 교육에 드리우는 그늘을 짧게 짚었다. 이제 그 그늘의 성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기계는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잘 쓰면 배움의 현실적 장벽을 넘어서는 좋은 도구가 된다. 시골 아이도 세계 석학들의 최신 지식을 쉽게 배울 수 있다. 값싼 기계가 값비싼 강사를 대신할 수도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계는 격차를 좁히는 좋은 도구다.

그러나 다른 면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기계를 가르침에 이용할수록 사람이 곁에서 직접 이끄는 교육은 도리어 더 비싸진다. 기계가 흔해지면 사람은 귀해지고, 귀해진 것은 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그 값을 치를 수 있는 집과 없는 집은 선택지가 다르다. 넉넉한 집은 기계와 사람을 함께 붙이고, 빠듯한 집은 기계만 붙여 준다. 앞의 글에서 말한 대로 한쪽 아이는 기계의 주인이 되고 다른 쪽 아이는 기계의 소비자로 남는데, 그 갈라짐을 정하는 것은 아이의 재능이 아니라 부모의 지갑이다. 이 갈라짐은 성적의 격차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방식의 차이를 벌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술이 격차를 키운다는 말은 반만 맞다. 기계는 죄가 없다. 격차를 키우는 것은 기계를 쓰는 방식이고, 그 방식은 경제력에 따라 정해진다. 그래서 이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진다. 잘 쓰는 법을 배운 아이는 갈수록 더 잘 쓰고, 받아 적는 법만 배운 아이는 계속 받아 적는다. 쓰는 방식의 작은 차이가 해를 거듭하며 더 크게 벌어진다.

시장은 이 격차를 좁혀 주지 않는다. 좋은 도구는 시장에 맡겨 두면 값을 더 치르는 쪽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더 나은 기계가 그렇고, 기계를 잘 쓰도록 곁에서 이끄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기술은 중립이다. 그러나 누가 좋은 기계를 쓰고 누가 이끄는 사람을 곁에 두는지는 부의 크기가 정한다. 소유는 중립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집에 태어났든 모든 아이가 공평하게 기계에 닿을 수 있어야 하고, 공평하게 쓸 수 있어야 하고, 공평하게 잘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시장은 그 일을 해 주지 않는다. 새 기술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것이 모두의 출발선을 고르게 할 것인가, 아니면 앞선 자를 더 앞세울 것인가? 답은 기술에 있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나누기로 정하느냐에 있다.

기르는 일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기르는 일을 사적인 일로만 둘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첫째, 교육의 목적 때문이다. 나는 오래전에 교육의 목적을 인격의 완성이라 주장했고, 앞의 글에서 그 뜻을 다시 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은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길러내는 일이다. 앞에서 경제력에 따라 배움의 질이 갈린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배움이 하는 일이 인격을 길러내는 것이라면, 배움의 질이 갈릴 때 끝내 갈리는 것은 인격을 길러낼 조건이다. 조건이 달라지면 자람의 양상도 달라질 수 있다. 교육 격차가 성적 격차에서 멈추지 않고 사람됨의 격차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다움 자체를 경제 형편에 맡기고, 사람됨의 밑천에 값을 매기는 셈이 된다. 그것은 사회가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밥이나 옷이라면 형편에 따라 달라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제대로 된 인격으로 서는 일만큼은, 결코 형편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둘째, 민주주의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제도이며 태도다. 민중에 의한 통치다. 그 통치를 떠받치는 것은 시민이다. 스스로 따져 묻고, 거짓을 가려내고, 다른 생각과 공존할 줄 아는 사람. 민주주의의 수준은 그 시민의 수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교육이 바로 그 일을 한다.[2] 시민을 기르는 일이 형편에 따라 갈리면, 시민의 자격도 형편에 따라 갈린다. 잘 길러진 소수는 제 목소리를 내고, 그러지 못한 다수는 목소리를 잃는다. 목소리를 잃은 자리를 선동가가 파고든다. 강한 지도자를 자처하며, 스스로 판단하기 버거워하는 사람들에게 손쉬운 적을 가리키고 분노를 부추긴다. 교육의 불평등은 그렇게 민주주의를 안에서부터 비워낸다. 나는 다른 글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비워지는가를 물었다. 그 비워짐이 시작되는 첫 자리가 바로 여기, 아이를 기르는 자리다.

셋째, 사회의 미래 때문이다. 한 사회가 가진 가장 큰 힘의 원천은 사람이다. 인구가 줄어드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 커진다. 그런데 우리는 적지 않은 아이들이 제 재능을 펴 보지도 못한 채 출발선에서 뒤처지도록 내버려 둔다. 이것은 그 아이 한 사람의 손실로 그치지 않는다. 그 아이가 사회에 보탤 수 있었던 몫만큼 사회 전체가 잃는다. 재능은 형편을 가려 태어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살림이 빠듯한 집에도 뛰어난 아이가 태어난다. 그런 아이의 빛나는 가능성을 가정 형편이 가로막으면, 사회는 제 미래의 일부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출발선을 나누는 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출발선을 나누는 일이다. 모두를 같은 틀에 찍어 내자는 말이 아니다. 획일화는 인격의 완성이라는 교육의 목적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아이마다 재능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다. 그 다름은 지켜야 한다. 나누자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출발선이다. 어느 집에 태어났든, 사람으로 서는 밑천만큼은 고르게 쥐고 시작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다음에 저마다의 재능과 노력으로 제 길을 가는 것, 그것이 공정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출발선부터 갈라 놓고 그 뒤의 달리기를 공정하다 부른다.

「87년 체제의 종언 그리고 새로운 역사적 전환」에서 나는 넷째 기둥을 고치는 일이 소유의 몫을 나누고 결정의 권한을 함께 쥐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교육에서 그것은 배움의 기회를 사회가 함께 소유하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를 시장에만 맡기지 않는 일이다. 이른 시기일수록 사회가 더 깊숙이 손을 대야 한다. 간격이 깊어지기 전에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품이 드는 교육을 형편 넉넉한 집만 누릴 수 있는 사치로 두지 말고, 모두의 몫으로 삼아야 한다. 기계가 흔해질수록 사람이 귀해진다면, 그 귀한 사람을 값으로 나누지 말고 공공의 손으로 나누어야 한다.

누군가는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이니 교육에 드는 돈부터 줄이자고 말한다. 그러나 셈을 제대로 하면 답은 반대다. 제임스 헤크먼(James Heckman)은 어린 시절에 들인 공적 투자가 이후 어느 시기의 투자보다 큰 수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평생에 걸친 추적과 연구로 입증했다. 사회가 일찍 품에 안은 아이는 덜 아프고, 덜 밀려나고, 더 벌고, 더 보탠다. 늦게 메우려면 몇 곱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 혹여 이 셈에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다. 눈앞의 이해를 셈하기 전에 옳고 그름을 먼저 생각하는 일, 나는 그것을 견리사의(見利思義)라 배웠다. 기르는 일에 드는 돈은 축나는 비용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사회의 꼴을 정하는 밑돈이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누구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 나부터 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의 의무다. 나는 기업을 경영하며 배운 것을 이 자리에 씨앗으로 뿌리려 한다. 낮에는 일터에서 소유와 결정을 나누는 실험을 하고, 그 실험에서 배운 것을 다음 세대를 기르는 일로 넓혀갈 것이다. 옳다고 믿는 일을 주저 없이 실천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근거 자료

이 글의 사실 진단은 몇몇 공개 통계와 연구에 기댔다. 본문에는 수치를 그대로 늘어놓지 않고 사실만 빌려 내 언어로 옮겼다. 자세한 수치는 아래에 정리한다.

소득에 따른 사교육 격차 —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27조 5천억 원이다.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45만 8천 원,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만 보면 60만 4천 원이다. 소득별 격차가 크다. 조사는 가구 월평균 소득을 300만 원 미만부터 800만 원 이상까지 구간으로 나누어 집계하며, 본문의 대비는 그 최상위 구간과 최하위 구간의 수치다. 800만 원 이상인 집은 학생 1인당 월 66만 2천 원을 쓰고, 300만 원 미만인 집은 19만 2천 원을 쓴다. 약 3.4배 차이다. 사교육 참여율도 각각 84.9%와 52.8%로 갈린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교육부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조사 결과」, 통계청 「한국의 사회동향 2025」)

교육을 통한 계층 대물림 —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에 따르면, 부모와 자녀 사이 경제력이 이어지는 정도(세대 간 경제력 탄력성) 가운데 약 절반은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 교육 투자를 거쳐 자녀 소득에 이르는 경로가 설명한다. 곧 부모의 부가 자녀의 소득으로 옮아가는 통로의 절반이 교육이다. (KDI 「한국의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 분석」)

얇아지는 계층 이동의 믿음 — 세대 간 계층 대물림이 강해지고 교육 격차가 벌어지면서, 상향 이동 가능성과 노력의 힘에 대한 회의가 퍼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한 연구는 부모의 자리가 자녀의 자리를 정하는 힘이 1970년대에 태어난 세대에서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로 넘어오며 뚜렷이 세졌다고 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국의 사회이동성 진단과 사회정책 개편방향 연구」, KDI 「사회 이동성 복원을 위한 교육정책의 방향」)

배경에 따른 성취 격차 — 국제 학업성취도 비교(PISA)에서 한국 학생의 평균 성취는 상위권이나, 학습의 양극화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벌어지는 축에 든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낮을수록 학생의 성취가 낮고 그 하락 폭도 크다는 양상이 읽기·수학·과학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난다. (PISA 분석 및 국내 교육격차 연구)

문화자본의 대물림 —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재생산』(La Reproduction, 1970)과 『구별짓기』(La Distinction, 1979)에서 계층이 돈(경제자본)만이 아니라 언어 습관·취향·문화적 소양, 곧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을 통해 대물림되며, 학교가 그 물려받은 자본을 개인의 성취로 오인해 불평등을 재생산한다고 분석했다.

조기 투자의 수익 — 제임스 헤크먼(James Heckman, 2000년 노벨 경제학상)은 페리 유아원 실험(Perry Preschool Project) 등 장기 추적 연구로, 취학 전 아동에 대한 공적 투자가 연 7~10% 수준의 사회적 수익률을 내며 이는 이후 어느 교육 단계의 투자보다 높다는 것을 보였다. 투자 시점이 이를수록 수익이 크고 늦을수록 보정 비용이 커진다는 이 관계를 흔히 '헤크먼 곡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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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1]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사교육의 목적과 방법과 양상이 과연 교육의 진정한 목적과 부합하느냐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나 개인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쪽이다. 그러나 입시 경쟁이 의무교육을 지나 대학으로 이어지고 대학교 이름이 계층을 가르는 현실에서 사교육이 무거운 몫을 하는 것을 인정하기에,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사교육을 다룬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사교육이라는 말은 가치 판단 없이 쓴다.
↩ [2] 우리나라의 교육이 내가 기억하는 88년부터 2026년 현재까지 그 일을 제대로 해 왔느냐고 물으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다. 그러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이 글의 주제와는 다른, 깊고 긴 논의다. 이 글에서는 우리 교육의 질과 방향의 시비를 따지지 않는다. 경제력에 따른 교육 격차의 구조와 그 문제의 심각성을 밝히고 해결의 단초를 찾는 일에 집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