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자유로워지는 길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 〉 '아빠의 앙가주망' 장 〉 '공동체주의' 편을 여는 얼굴글이자, 장 전체를 매듭짓는 종합 글이다. 여는 글 「87년 체제의 종언 그리고 새로운 역사적 전환」이 연 것을 이 글이 닫는다. 여는 글은 세 가지를 약속했다 —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선 자리에서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앞의 갈래 글들이 첫째 약속을 갚았고, 이 글이 둘째 약속을 갚으며, 셋째 약속은 뒤의 글 「임직원 공동소유기업 만들기 실험」이 실물로 갚는다.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출간 준비 중)에 실을 글을 웹에 맞게 고쳤다. 게시일 2026-07-28.
네 갈래가 한 곳에서 만난다
이 장에서 나는 앙가주망(engagement)을 선언하며 네 갈래 길을 걸었다. 민주주의, 기술, 노동, 보육과 교육. 갈래마다 진단한 증상은 달라 보였지만, 걷고 보니 네 길은 한 곳에서 만났다.
「민주주의」 편에서 나는 물었다. 누가 민주주의를 비우는가? 내가 지목한 범인은 하나의 얼굴로 정의할 수 있는 악당이 아니었다. 광장에서 결정권이 빠져나가고, 갈등은 풀리는 대신 덮인다. 이 둘이 서로를 강화하는 되먹임 회로(feedback loop)가 민주주의를 비운다. 나는 그 회로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사적 권력과 불평등, 곧 설계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 진단을 광장 밖으로도 넓혔다. 나누는 일을 미룬 값이 빚으로 쌓여 밖에서도 민주주의를 조여 온다. 그래서 처방이 도달할 자리는 결정권이었고, 나는 일터가 그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 번 비워진 것을 다시 채우는 일은 한 번의 기적 같은 성취가 아니라 날마다 다시 여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고 맺었다.
「기술 진보의 사회 영향」 편에서 나는 일터에 기계를 들이는 사람으로서 물었다. 기계가 늘린 몫은 어디로 가는가? 기계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늘어난 몫이 소유 쪽으로만 흐르도록 정한 것은 사람이 짠 규칙이었다. 기계의 비용은 노동이 함께 번 돈으로 치르는데 늘어난 이득은 소유에게만 쌓이는 어긋남, 곧 기여는 노동으로 하는데 몫은 소유로만 받는 구조가 그 규칙의 실체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토양에서는 과세보다 소유가 먼저라고 판정하고, 모두에게 자본의 지분을 미리 심는 길 — 지분을 담을 그릇과 그 그릇을 채울 엔진까지 — 을 그렸다. 다만 물음 하나를 남겨 두었다. 소유를 나누는 것만으로 사람이 정말 주인이 되는가?
「노동/재교육」 편에서 나는 물었다. 누가 사다리를 치웠는가. 이번에도 범인으로 특정할 만한 악당은 없었다. 사다리를 치운 것은 규칙이었다. 신입을 뽑아 기르기보다 기계를 들이는 편이 이득이 되게 짜인 규칙, 쌓인 부에는 가볍게 묻고 일해서 버는 돈에는 꼬박꼬박 묻는 규칙, 먼저 밀려나는 사람에게 배울 기회가 늦게 가도록 놓아두는 규칙. 그런 규칙이 쌓여 사다리의 입구를 끊었고, 이미 오른 사람의 발밑마저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다시 놓는 사다리는 예전 것과 달라야 한다. 남보다 높이 오르는 사다리가 아니라, 일하는 자리에서 사람이 주체로 서는 사다리여야 한다.
「보육과 교육」 편에서 나는 쏠림이 가장 일찍, 가장 깊게 새겨지는 자리를 보았다. 바로 출발선이다. 아이가 첫발을 딛는 곳에서부터 소유의 격차가 배움의 격차로, 배움의 격차가 제 삶을 스스로 묻고 결정하는 힘의 격차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기르는 일이 사적인 일이 아니라고 썼다. 배움의 기회를 사회가 함께 소유하고, 기계가 벌어 준 것의 첫 몫을 사람 기르는 일에 두자고 썼다. 기계가 더 쉽게 지식을 전달해 주는 시대일수록 근본을 가르치는 배움터가 더 필요하다고 썼다. 교육은 줄일 곳이 아니라 늘릴 곳이다.
이 넷은 한 병의 네 증상이다. 병명은 소유와 결정의 쏠림이다. 증상의 이름은 저마다 다르다. 비워진 광장, 쏠린 몫, 치워진 사다리, 갈라진 출발선. 그러나 넷이 비우는 자리는 하나다. 시민의 주체성이다.
이 시선은 나만의 통찰이 아니다. 불평등에 맞서는 국제 시민 연대를 이끄는 젠니 릭스(Jenny Ricks)는 세계 곳곳에서 같은 자각이 번지고 있다고 전한다. 번 돈의 절반 넘게 일터 오가는 길에 쓰는 청소 노동자가, 비료 살 돈이 없는 농부가, 제 노동이 국민계정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 돌봄 노동자가, 저마다 다른 줄 알았던 제 문제를 하나의 구조적 결함이 낳은 증상으로 알아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브라질 대통령 룰라의 말도 결국 같은 것을 지적한다. 시민이 제 삶이 나아진다고 믿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포퓰리스트의 도전에 계속 시달린다.[1] 진단이 하나로 모이면 처방도 하나로 모인다. 사실 그 처방은 이미 이 편의 표제인 '공동체주의'가 말해 주고 있다. 그 처방을 말하기 전에, 표제의 개념부터 짚고 나아가자.
왜 공동체주의인가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이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는 공동체(community)에서 나온 말이다. 이름에 '주의'가 붙어 이념의 냄새를 풍긴다. 그 냄새에 흔한 오해가 따라붙는다. 개인을 지우고 집단을 앞세우는 사상이라는 오해다.
정반대다. 공동체주의가 붙드는 물음은 이것이다. 개인이 주체로 서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 조건을 늘어놓아 보면 답이 보인다. 고른 출발선, 주인으로 서는 일터, 살아 있는 공론장, 기계가 늘린 몫의 공정한 지분. 어느 것 하나 개인이 혼자 만들지 못한다. 함께 지어야 하는 조건이다. 개인의 자유를 귀하게 여기기에 그 자유의 조건을 함께 짓자는 것, 그것이 공동체주의다. 개인을 누르는 사상이 아니라, 개인이 서는 땅을 함께 고르는 태도다.
우리 시대에 공동체주의를 말하며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을 비켜 갈 수는 없다. 그는 능력주의의 오만을 겨누며 이렇게 물었다. 내가 이룬 것이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룬 것인가? 타고난 재능도, 그 재능을 높이 사 주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내가 고른 것이 아니다. 성공에는 행운과 공동체의 몫이 섞여 있으니, 그 빚을 아는 겸손이 공동선(common good)을 되살리는 출발이라고 그는 답한다. 이 물음 곁에 나는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명제를 놓는다. 자유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다. 모두가 함께 자유로울 때 비로소 자유롭다. 이 글의 제목은 거기서 왔다.
동양의 언어로도 같은 명제를 세울 수 있다. 신영복 선생은 자유(自由)를 '자기의 이유'라고 풀었다. 제 삶의 이유를 제 안에서 대는 사람이 자유인이다. 그런데 제 이유를 대려면 먼저 물을 수 있어야 하고, 물으려면 설 땅이 있어야 한다. 맹자(孟子)는 남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느끼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사람다움의 첫 싹으로 꼽았다. 이웃이 설 땅을 함께 고르는 마음은 그러니 이념이기 전에 사람다움이다. 권력이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함께 말하고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다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통찰도 같은 곳을 비추는데, 그 이야기는 이 글이 아닌 다른 책의 몫으로 미룬다.
소유를 나누고 결정을 함께 쥔다
이제 처방을 이야기할 때다. 새로운 처방을 논할 필요가 없다. 네 갈래 글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이미 처방을 내렸고, 그 처방들이 같은 동사를 쓴다. 민주주의 편은 결정권을 함께 쥐자 했다. 기술 편은 지분을 미리 나누자 했다. 노동 편은 사람이 서는 자리를 함께 짓자 했다. 보육과 교육 편은 배움의 기회를 함께 소유하고 그 비용을 함께 치르자 했다. 네 문장을 겹치면 한 문장이 남는다. 소유를 나누고 결정을 함께 쥐어, 사람에게 주인의 자리를 돌려준다.
기술 편이 남긴 물음에 답해 보자. 소유를 나누면 사람이 정말 주인이 되는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소유는 시작이다. 장부에 지분이 적혔다고 주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 지분이 발언이 되고 발언이 결정에 닿을 때, 곧 소유가 결정의 힘으로 이어질 때 사람은 주인이 된다. 노동 편이 미뤄 둔 이야기 — 일터에서 주인이 되는 이야기 — 가 바로 이 이어짐이다. 여기에 민주주의 편의 결론을 겹쳐 둔다. 그 이어짐은 한 번의 설계로 완성되지 않는다. 날마다 다시 여는 과정이다. 주인의 자리는 상속받는 지위가 아니라 날마다 되찾는 자리다.
고단하게 들릴 수 있다. 쉬운 길이 아님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본다. 민주주의 편에서 나는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의 진단을 빌렸다. 그는 불평등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설계의 결과라고 논증했다. 그 설계에 문제가 있다면 다시 설계하면 된다. 사람이 정한 규칙은 사람이 고칠 수 있다. 쏠림이 깊다는 사실은 좌절할 근거가 아니라, 고칠 자리가 또렷하다는 뜻이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그러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세 층위를 제안한다.
먼저 개인, 곧 시민의 층위다. 거창할 것 없다. 배우는 일에서 시작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인다. 다음은 따져 묻는 일이다. 기계가 내놓는 답을, 언론이 전하는 말을, 권력이 내미는 약속을 그대로 삼키지 않고 가려 읽는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일이다. 투표하고, 광장에 서고, 목소리를 보탠다. 여는 글에서 나는 내 앙가주망을 한 줄로 줄였다. 낮에는 일터로, 밤에는 광장으로. 밤의 광장이 이 층위다.
다음은 기업의 층위다. 낮의 일터가 여기다. 사람은 하루의 절반을 일터에서 보낸다. 그 긴 낮 동안 한 번도 시민이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 밤의 광장에서만 주인이 되라는 말은 공허하다. 그러니 일터에서 자본의 소유를 나누고 결정의 권한을 함께 쥐는 일이 이 층위의 과제다. 나는 이 과제를 내 회사에서 실험하고 있다. 그 실물은 바로 뒤의 글에 적었다.
마지막은 사회와 정부의 층위다. 거대 담론이다. 구체성이 없으면 공허한 외침으로 그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만이라도 짚어 둔다. 기계가 늘릴 몫에 모두의 지분을 미리 심는 사전분배. 다시 배우는 일을 개인의 생존술이 아니라 사회의 책무로 세우는 일. 보육과 교육에 공공이 먼저 투자해 출발선을 고르는 일. 찢어진 공론장을 깁는 일. 그리고 이 모두를 담도록 새 시대에 맞는 헌법을 짓는 일. 하나하나의 상세는 앞의 글들이 이미 맡았다.
한 가지만 덧붙인다. 다수가 쓰지 않은 규칙의 값을 다수에게 물리는 일그러진 구조는 한 나라 안에만 있지 않다. 릭스가 세계의 사례에서 보여 준 그대로, 나라 사이에도 같은 쏠림이 있다. 그러니 새 질서를 지으려면 그 값을 치러 온 이들이 규칙을 쓰는 자리에 함께 앉아야 한다. 이는 이 책에 다 담지 못할 이야기라 이 정도만 적어 둔다.
내가 선 자리
지도를 그렸으니 내 자리를 밝힌다. 나는 두 자리에서 이 지도 위를 걷는다. 한 자리는 일터다. 거기서 소유를 나누고 결정을 함께 쥐는 실험을 한다. 다른 한 자리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만든 단체다. 거기서는 다음 세대의 삶을 좌우할 다섯 분야에 관심과 경험과 자본을 심는다. 보육과 교육 편의 끝에서 밝힌 다짐이 이 지도의 어디쯤에 있는지, 이제는 보이리라 믿는다. 실험의 경과와 아쉬움과 두려움은 바로 뒤의 글에 담았다. 그 실험을 떠받치는 사상의 토대 — 소유만으로 왜 모자라며, 권력을 어떻게 함께 쥘 것인가 — 는 따로 펴낼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에 썼다. 이 글은 '왜'와 밑그림까지만 맡고, '어떻게'의 상세는 그 책에 맡긴다.
근거 자료
이 글은 수확하는 글이지 입증하는 글이 아니다. 본문에 새 수치를 들이지 않았고, 근거가 필요한 대목은 각 편의 논설이 이미 맡았다. 이 글이 기댄 원천만 아래에 밝힌다.
네 갈래의 소결 — 마디 1의 네 문단은 각 편의 결론을 이 글의 흐름으로 눌러 쓴 것이다.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비워지는가」 5장과 닫는 글(회로, 결정권, 일터, 날마다 다시 여는 과정), 「빚이 떠받친 번영」 닫는 마디(나누기를 미룬 값이 빚으로 쌓여 민주주의를 조여 온다). 기술: 「기계를 들이는 사람」 5마디와 「과세보다 소유」 6마디(쏠림은 사람이 정한 짜임, 과세보다 소유, 남긴 물음). 노동: 「누가 사다리를 치웠는가」 5마디(치운 것은 규칙, 서는 사다리). 보육·교육: 「대물림되는 출발선」 6절과 「학교는 무엇을 남기는가」 끝마디(출발선을 나누는 일, 기계의 열매의 첫 몫).
세계의 자각과 규칙을 쓰는 자리 — 젠니 릭스(Jenny Ricks), "Three Essentials of a More Equal World Order", Project Syndicate, 2026. 7. 릭스는 불평등에 맞서는 국제 시민 연대체를 이끄는 활동가다. 마디 1의 세 심상(품삯의 절반 넘게를 길에 쓰는 청소 노동자, 비료를 못 사는 농부, 국민계정에 잡히지 않는 돌봄 노동자)과 마디 4의 세계 층위(다수가 쓰지 않은 규칙, 규칙을 쓰는 자리)를 이 컬럼에서 눌러 옮겼다. 컬럼이 제안하는 국제 금융 설계의 상세 — 국가부채 구조조정의 구속력 있는 절차, UN 국제조세협력 기본협약, 최상위 부에 대한 공동 과세 — 는 이 책의 그릇이 아니어서 들이지 않았다.
사상의 닻 —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 2020)의 능력주의 비판. 성공에 섞인 행운과 공동체의 몫, 그 빚을 아는 겸손, 공동선(common good)의 회복. 칼 폴라니(Karl Polanyi),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1944)의 마지막 장(21장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이 말하는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 본문의 두 문장(자유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다, 모두가 함께 자유로울 때 비로소 자유롭다)은 폴라니의 원문이 아니라 그 논지를 내 언어로 줄인 것이다. 신영복, 『담론』의 '자기의 이유'. 맹자의 측은지심(사단). 스티글리츠의 진단(불평등은 설계의 결과)은 「위협의 시대 — 민주주의를 다시 묻다」에서 첫 등장한 논지를 되받았다.
옛 글 — 「87년 체제의 종언 그리고 새로운 역사적 전환」: 넷째 기둥(경제의 비민주성), "낮에는 일터로, 밤에는 광장으로", 지우학. 「임직원 공동소유기업 만들기 실험」: 기업 층위의 실물.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 사상의 토대와 '어떻게'의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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