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의 시대, 민주주의를 다시 묻다

연작 '아빠의 앙가주망' 민주주의 편을 여는 얼굴글이다. 이 글이 세운 물음 — 어떻게 민주주의를 회복할 것인가 — 에 논설 「민주주의는 어떻게 비워지는가」와 「빚이 떠받친 번영」이 차례로 답한다.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출간 준비 중)에 실을 글을 웹에 맞게 고쳤다.

게시일: 2026-04-30

합법의 외피를 쓴 위협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군(軍)이 국회로 향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시민들이 군을 막아선 덕에 국회는 그 밤에 계엄 해제를 결의했다. 친위 쿠데타는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꺾였다. 같은 무렵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선거로 두 번째 권력을 잡았다. 그는 쿠데타 없이, 합법의 외피를 쓰고 제도를 빠르게 허물기 시작했다.

두 장면은 한 시대의 두 얼굴이다. 한쪽은 20세기의 재현이다. 계엄, 헬기, 노골적인 힘. 다른 쪽은 21세기의 새로운 시도다. 표로 권력을 쥐고, 선거와 의회와 법을 그대로 둔 채 그 안의 알맹이를 파낸다. 20세기의 독재는 탱크를 앞세워 왔다가 표의 힘 앞에 무너졌다. 오늘날의 위협은 반대다. 표의 힘을 업고 와서, 제도의 껍데기만 남겨둔 채 시민이 실제로 행사하던 힘만 빼낸다. 그래서 더 깊고 끈질긴 위험이다.

이것은 한두 나라의 일이 아니다. 예테보리 대학교 V-Dem 연구소의 「민주주의 보고서 2026」(Democracy Report 2026: Unraveling The Democratic Era?)는 그 규모를 수치로 보여 준다. 평균적인 시민이 누리는 민주주의 수준은 1978년으로 되돌아갔다. 세계 인구의 74%가 권위주의 체제 아래 산다. 2005년 수치가 50%였으니 20년 동안 진보는 없고 쇠퇴만 한 셈이다. 자유민주주의 아래 사는 사람은 7%, 약 6억 명에 불과하다. 보고서는 미국조차 2025년 기준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지위를 잃었다고 말한다. 보고서가 거듭 지적한다 — 오늘날의 후퇴는 대개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동력을 그대로 둔 채, 제도를 안에서부터 허물어뜨린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쇠퇴는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백주 대낮에 일어난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데도 쉽사리 막지 못한다. 처음에 시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다가 시민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위협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세를 불린다. 2026년 대한민국에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 사태를 관찰하며 세 가지를 묻는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는가?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물음 —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 느린 사치라는 착시

사람들은 점점 민주주의를 느리고 답답한 체제로 여기는 듯하다. 토론은 길고 타협은 더디다. 결정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는다. 숙의와 합의를 핑계로 미뤄지다 사라지는 것들도 많다. 전에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느린 사치(slow luxury)’처럼 보인다. 반대편에서 권위주의는 속도와 질서를 약속한다. 시진핑의 중국, 푸틴의 러시아, 트럼프의 미국은 신속한 결정과 강한 집행을 선보인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토론하는 체제보다 명령하는 체제가 유능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착시다. 권위주의가 안정돼 보이는 까닭은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라 갈등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는 불평등과 균열을 감춰 사회가 평온한 듯 꾸민다. 민주주의는 반대다. 의견을 말하고 진실을 파헤치며 갈등을 드러낸다. 언로를 막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 시끄럽고 더 불안정해 보인다. 이런 종류의 시끄러움은 병증이 아니라 건강의 표시인데, 사람들은 자주 그 둘을 거꾸로 해석한다.

그러나 권위주의의 이른바 효율은 오래가지 못한다. 권력이 한곳에 쏠리면 지도자의 변덕과 불안이 국가의 이익에 앞서기 마련이다. 견제가 사라진 자리에서 독재자는 예스맨에게 둘러싸인다. 유능한 전문가를 내치고 충성파로 그 자리를 채운다. 그 조직에서 사람들은 성과가 아니라 충성을 다툰다. 공적 목적은 뒤로 밀리고 사적 이익이 앞선다. 인사는 기준을 잃고, 자리는 능력이 아니라 연줄로 채워진다. 그렇게 조직은 무능해지고, 행정은 굼떠지다 멈춘다. 부정과 부패가 일상이 된다. 시민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국가를 믿지 않게 된다. 끝까지 가면 그 곪음은 무능한 군대와 파괴적인 전쟁, 혁신 역량의 붕괴로 터진다. 그러나 그 극단에 이르기 한참 전에, 권위주의는 이미 안에서 썩는다. 짧은 효율을 얻을지는 몰라도 십중팔구 긴 재앙을 잉태한다.

법을 멈추고 사실을 끊다

현대의 권위주의는 안에서 자란다.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뒤 민주적 제도를 안에서부터 허문다. 이상하게도 이 패턴은 반복된다. 히틀러가 선보인 이래 잠시 사라진 듯하다가 윤석열이 재현했고, 이제 트럼프가 뒤따르고 있다. 윤석열은 ‘반국가세력’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군대를 동원하려다 실패했다. 트럼프는 그 실패에서 배운 듯, 군대 대신 이민 단속 기구(ICE)를 앞세워 합법과 불법의 위험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핵심 수법은 ‘국경의 무법화’다. 국경에서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권력은 국가 전체로 넓힌다. 그렇게 초법적 구금과 폭력을 ‘법 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일상화한다. 푸코(Michel Foucault)는 현대 권력이 폭군의 얼굴이 아니라 치안과 행정의 얼굴로 온다고 말했다.[foucault] 아감벤(Giorgio Agamben)은 그 얼굴을 예외상태(stato di eccezione)라는 개념으로 날카롭게 벼려냈다.[agamben] 법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스스로를 멈추는 자리, 법 안에 열린 법 없는 지대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폭력은 법을 부수는 폭력이 아니라, 법의 이름을 입은 폭력이다.

또 하나의 수법은 ‘책임의 절단’이다. 과거의 파시즘이 검열과 공포를 썼다면, 오늘의 파시즘 전략은 더 교묘하다. 사실이 보도되고 검증돼도 권력자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렌트(Hannah Arendt)는 일찍이 이 기제를 꿰뚫어 보았다.[arendt] 전체주의 선전의 목표는 거짓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과 거짓을 가리는 힘 자체를 허무는 것이다. 무엇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은 맞설 수도 없다. 이 사실 면역 앞에서 폭로는 무력해진다. 민주주의는 어둠이 아니라 백주 대낮에 죽는다.

두 나라의 광장이 이를 함께 보여줬다. 2021년 1월 미국의 의회 폭동과 2025년 1월 한국의 서부지법 폭동은 쌍둥이다.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국가기관에 폭력을 행사하고, 극단주의 세력이 제도권 정당으로 파고든다. 관료 조직마저 정치에 물든다. 미국은 전문 관료를 숙청하고 충성파로 채운다. 한국은 손익은 잘 따지면서 의미는 묻지 못하는 공직의 무사유를 드러냈다. 유능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능해지는 광경을, 우리는 그 겨울에 매일 보았다.

드러내고 걸러내는 곳, 공론장

이 모든 일이 조용히 진행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시민의 눈을 가려야 한다. 그래서 권력은 공론장을 노린다. 공론장은 두 가지 일을 한다. 결정 과정이 드러나는 무대이자 동시에 무대 위에서 오가는 말 중에 거짓을 걸러내는 거름망이다.

무대. 권력이 무엇을 결정하고 그 결정이 누구에게 유리하며 그 값을 누가 치르는지, 그것이 공론장에 올라와야 비로소 보인다. 눈을 뜬 시민은 묻게 되고, 시민이 물으면 권력은 답해야 한다. 그 묻고 답하는 고리가 결정권을 시민 편에 붙들어 둔다. 공론장이 무너지면 조명이 꺼진다. 어두운 무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답할 필요가 없어진 권력은 시민을 거치지 않고 정하고, 결정권은 시민의 시선 밖에서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간다.

거름망. 미국에서는 억만장자들이 언론을 사들였다. 베이조스가 신문을, 엘리슨이 방송을 손에 쥐고 있다. 머스크는 최대 SNS 플랫폼을 인수해 전문가의 검증과 의제 설정 기능을 무너뜨렸다. 한국에서는 갈등을 키울수록 돈이 되는 디지털 미디어가 정치를 상품으로 팔았다. 부정선거론이 바로 그 통로를 타고 퍼져나갔다. 사실과 거짓을 걸러 주던 매개 기구 — 정당과 전문 언론 — 가 동시에 약해졌다. 거름망이 찢어진 세상에서 거짓은 빠르고 진실은 느리다. V-Dem 연구소도 표현의 자유가 오늘날 가장 빠르게 무너지는 권리라고 말한다. 공론장의 붕괴가 권위주의화의 앞선 징후라는 뜻이다.

다만 나는 공론장의 붕괴가 근본 원인 그 자체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근본 원인을 두텁게 가리고 있는 장막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워짐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라, 비워짐을 보이지 않게 가리고 동시에 속도를 더하는 매질이다.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다.

문제의 뿌리는 사적 권력이다

지금까지의 진단은 한 곳을 가리킨다. 바로 1980년대 이후 본격화한 사적 권력(private power)과 불평등이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자본 집중적 기술 변화는 막대한 사적 권력을 만들었다. 그 권력은 부를 한쪽으로 몰았고, 부의 쏠림은 정치의 쏠림으로 번졌다.

경제학은 이 사태를 일찍 지적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 2012)에서 불평등이 시장의 자연법칙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불평등은 정책과 정치가 빚은 결과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 진단에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함께 있다. 먼저 어두운 면을 살펴보자. 불평등이 정책적·정치적 귀결이라는 말은 그것이 예기치 못한 사고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누군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규칙을 짠 결과라는 말이다. 세금과 규제와 노동의 법이 그렇게 기울어 있다. 불평등은 실수가 아니라 설계의 결과다. 그래서 무겁다. 동시에 그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밝은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문제의 원인이 설계라면 다시, 올바로 설계하면 된다. 사람이 정한 규칙은 사람이 다시 정할 수 있다. 회복의 길이 열려 있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Le Capital au XXIe siècle, 2013)에서 그 동학을 식 하나로 압축한다. 자본수익률(r)이 성장률(g)을 웃돌면(r>g) 부는 저절로 쌓인다. 쌓인 부는 과두제를 잉태하고, 과두제는 민주적 평등을 무너뜨린다. 부의 쏠림은 곧 발언권의 쏠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피케티가 이끄는 세계불평등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의 「세계불평등보고서 2026」(World Inequality Report 2026)이 그 쏠림을 수치로 보여준다. 세계 상위 10%가 부의 4분의 3을 소유하고, 하위 절반은 부의 2%를 나눠 갖는다. 6만 명도 안 되는 상위 0.001%가 인류 절반보다 세 배나 많은 부를 가지고 있고, 그 격차는 1995년 4%에서 오늘 6%로 더 벌어졌다.

보고서는 그 부가 정치로 번지는 길까지 조명한다. 한국과 프랑스에서는 정치 후원금의 다수를 상위 10%가 댄다. 돈의 힘이 그대로 목소리의 힘이 되어, 소수의 말이 다수의 말을 덮는다. 보고서의 결론은 한 줄이다. 불평등은 시장의 운명이 아니라 정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이 민주주의의 알맹이를 비우고 합의를 침식한다.

한국의 수치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2024)를 보면, 순자산 상위 10%가 전체 가구 순자산의 44.4%를 가지고 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소득과 자산의 간극이다. 소득의 지니계수는 0.323인데, 자산의 지니계수는 0.612다. 갑절에 가깝다. 버는 몫의 불평등보다 쌓인 몫의 불평등이 훨씬 깊다는 뜻이다. 피케티가 말한 r>g가 한국에서 정확하게 작동한다.

이 뿌리에서 앞서 말한 가지들이 모두 자라난다. 기술·금융 과두는 국가와 공론장을 함께 포획한다. 대중 앞에서는 기득권을 욕하면서, 뒤로는 그 기득권과 손잡는다. 규제를 풀어 주는 대가로 정부 데이터와 감시 역량을 얻는다. 한편 양극화는 학위 없는 노동자의 생계를 부순다. 무너진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자신을 버렸다고 느낀다. 그 절망과 원한이 극우 포퓰리즘의 땔감이 된다. 미국의 MAGA와 영국의 브렉시트(Brexit)가 같은 구조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위기는 한 갈래가 아니다. 네 갈래가 한 불길로 맞물린다. 양극화가 원한을 낳고, 원한이 포퓰리즘을 키우고, 오염된 공론장이 그 불길을 부추기고, 무너진 신뢰가 불을 끌 물을 고갈시킨다. 각각의 갈래를 별개의 문제로 보면 처방도 제각기 흩어질 수밖에 없다. 네 갈래를 한 책상에 올려야 비로소 사태의 진정한 윤곽이 보인다.

한국에 보이는 두 얼굴

이 우울한 진단 위에서 한국을 바라보면 두 얼굴이 보인다.

한 얼굴은 희망이다. 한국의 엘리트는 오랫동안 게을렀다. 그러나 시민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 시민은 수십 년에 걸쳐 시민의식과 연대의식을 다졌다. 1960년 4월 혁명이 이승만의 장기 독재 욕망을 무너뜨렸고, 1979년 부마항쟁이 유신 독재에 맞섰으며, 1980년 오월 광주와 1987년 6월 항쟁이 끝내 군부를 직선제 앞에 무릎 꿇렸다. 그 피와 빛이 2016년 촛불 혁명으로, 다시 2024년 12·3 이후 빛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시민의 손에 들린 응원봉이 만든 빛의 물결이 또다시 어둠을 밀어냈다. 세계적으로 계엄이 실패하는 일은 드물다. 한국사에서도 이전까지 계엄이 시작하자마자 꺾인 적은 없었다. 그 드문 일을 한국 시민이 해냈다. 미국의 시민 제도가 안에서부터 침식되는 동안, 한국의 시민은 광장에서 권력을 막아 세웠다. 강한 시민이 약한 엘리트를 구했다.

다른 얼굴은 경고다. 그 연대는 수시로 위태롭다. 거대한 위기 앞에서만 잠깐 뭉치고, 위기가 옅어지면 다시 흩어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대는 열린 광장이 아니라 닫힌 동호회를 닮아 있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함께 풀어 갈 담론장은 좀처럼 자라나지 못한다. 그나마 남은 토론의 자리마저 뉴미디어가 오염시킨다. 알고리즘은 분노를 키우고, 잘 짜인 내러티브가 검증된 사실을 덮으며, 한번 굳어진 세계관은 사실로도 논리로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그렇게 뉴미디어는 사실을 따지는 토론을 진영을 확인하는 의식으로 바꾸고, 그 자리에서 말은 설득이 아니라 동원이 된다. 그래서 시민은 같은 광장에서도 저마다 다른 사실 위에 서 있다. 회복하려던 민주성이 회복의 한복판에서 다시 비워진다. 어쩌면 더 깊은 비워짐이 광장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은 증거인 동시에 경고다. 시민은 권위주의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막아 세운 그 자리에 민주주의가 저절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승리를 미리 단언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시 묻는다

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겠다. 고도로 교육받고 촘촘히 연결된 사회는 공포만으로 다스릴 수 없다. 선택과 자율에 익숙해진 사람은 끝내 자유를 다시 부른다. 독재의 진짜 적은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그러나 희망은 단언이 아니라 조건이다. 민주주의는 저절로 돌아오지 않는다. 뿌리부터 바꿀 때 비로소 돌아온다. 스티글리츠가 옳다면 불평등은 정치의 산물이고, 그렇다면 정치로 되돌릴 수 있다. 그것이 조건의 내용이다. 문제의 뿌리가 집중된 사적 권력이라면, 광장의 회복만으로는 모자라다. 회복의 손길은 그 권력이 실제로 깃든 자리까지 닿아야 한다.

회복은 제도의 일이기 전에 태도의 일이다. 시민의 몫은 광장에 서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다. 흐려진 사실을 걸러 읽는 눈, 합법의 외피 안쪽을 들여다보는 눈을 기르는 일이 먼저다. 사회의 몫은 그 눈이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이다. 법원과 언론과 선거를 겉모양으로 두지 않고 알맹이를 다시 채우는 일, 곧 흩어진 시민에게서 빠져나간 결정권을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다.

이 글은 그 자리를 다 그리지 못한다. 다만 물음을 또렷이 세워 다음 과제로 넘긴다. 어떻게 민주주의를 회복할 것인가? 비워진 것을 무엇으로, 어디서부터 다시 채울 것인가? 한 가지만 미리 적어 둔다. 사적 권력이 가장 짙게 모인 자리 가운데 하나가 일터다. 우리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면서도 좀처럼 시민이 되지 못하는 곳. 거기서부터 다시 묻는 일이, 이 글 다음에 올 작업이다.

2026년 4월


참고 문헌

  • 마리나 노르드(Marina Nord) 외. 「민주주의 보고서 2026: 민주주의 시대는 풀어헤쳐지는가?」(Democracy Report 2026: Unraveling The Democratic Era?). 예테보리 대학교 V-Dem 연구소(V-Dem Institute), 2026.
  • 뤼카 샹셀(Lucas Chancel)·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외. 「세계불평등보고서 2026」(World Inequality Report 2026). 세계불평등연구소(World Inequality Lab), 2026. 서문 자야티 고시(Jayati Ghosh)·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
  •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 「2024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 통계청, 2024.
  •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안전, 영토, 인구』(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 Seuil/Gallimard, 2004.
  •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예외상태』(Stato di eccezione). Bollati Boringhieri, 2003.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Brace, 1951.
  •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 W. W. Norton, 2012.
  •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21세기 자본』(Le Capital au XXIe siècle). Seuil, 2013.
↩ [foucault]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안전, 영토, 인구』(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 현대 권력을 군주의 금지가 아니라 치안·행정·안전의 통치성으로 읽는다.
↩ [agamben]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예외상태』(Stato di eccezione, 2003). 법이 스스로를 정지시켜 법 안에 법 없는 지대를 여는 구조를 분석한다. 그 지대에 놓인 존재가 『호모 사케르』(Homo sacer, 1995)의 '벌거벗은 생명(nuda vita)'이다.
↩ [arendt]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전체주의 선전이 참과 거짓을 가리는 능력 자체를 허문다는 분석은 이 책의 이데올로기·테러 장에 있다. 「진리와 정치」(Truth and Politics, 1967)도 함께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