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어떻게 비워지는가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 〉 '아빠의 앙가주망' 장 〉 민주주의 편의 둘째 글이다. 앞의 글 「위협의 시대 — 민주주의를 다시 묻다」가 위협의 세 얼굴 — 잠식·공동화·권위주의화 — 를 물었다면, 이 글은 그 가운데 공동화를 한 편의 논증으로 푼다. 셋째 글 「빚이 떠받친 번영」이 뒤를 잇는다.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출간 준비 중)에 실을 글을 웹에 맞게 고쳤다. 게시일 2026-07-28.
여는 글 — 비어 있는 주어
우리는 위협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위협의 정체를 알기 위해 나는 현대 정치철학의 주요 사조를 톺아보았다. 그 진단들을 하나의 논증으로 엮어 이 글에 「민주주의는 어떻게 비워지는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비워지다’는 피동사다. 피동은 행위의 주체를 문장 밖에 둔다. 그러므로 이 제목은 정작 누가 민주주의를 비우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 빠진 주어를 묻는 데서 이 글을 시작한다.
누가 민주주의를 비우는가? 시장(market)인가, 기업 엘리트(corporate elite)인가, 선출되지 않은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인가, 채권자(creditor)인가, 아니면 민주주의 자신인가. 비어 있는 주어를 묻는 일을 출발점으로 삼은 까닭은, 그것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다른 위협들과 갈리는 결정적 지점이기 때문이다.
보통 위협에는 분명한 행위자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선출된 독재자가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자신의 적을 지목한다. 물리적 강압이 시민의 집회를 막는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명확히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비워지는 사태에는 그런 분명한 행위자가 보이지 않는다. 누가 비우는지 찾으려 해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선거와 의회와 정당은 그대로 작동하는데, 그 제도가 담아야 할 실질만 알게 모르게 빠져나간다. 그러므로 피동형을 띤 제목은 그 자체로 진단의 일부다. 행위자가 또렷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물음을 둘로 나눈다. 첫째, 누가 민주주의를 비우는가. 둘째, 비워진 것을 다시 채울 수 있는가. 이 글은 답을 미리 정해 두지 않는다. 이 글의 성격은 종합이다. 「현대 정치철학 지도 — 위협의 시대를 읽다」에서 사상가별 항목에 흩어져 있는 ‘공동화’ 진단을 한자리에 모아, 하나의 논증으로 다시 세운다. 지도가 따로 떨어뜨려 둔 진단들 —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 월린의 뒤집힌 전체주의, 무페의 탈정치, 발리바르의 내재적 모순 — 을 한 줄로 잇는다. 그 논증의 끝에서 빈 주어를 채운다. 다만 누가 비우는지 답하기 전에 먼저 가려야 할 것이 있다. 지금 문제 삼는 비워짐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비워짐인가를 밝히는 일이다.
1. 비워짐이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힘은 세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잠식, 공동화, 권위주의화다. 이 셋을 구분하는 기준이 곧 이 글이 다루는 ‘비워짐’의 뜻을 정한다.
잠식은 민주주의의 형식 자체를 조금씩 깎아 낸다. 권력이 법원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언론을 규제하는 법을 고치고, 집권자의 임기 제한을 없앤다. 제도의 골격을 단계적으로 변형하는 방식이다. 권위주의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식을 깨뜨리고 노골적인 강압으로 전환한다.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물리력을 동원한다. 이 두 방식은 민주주의의 형식을 직접 건드린다. 공동화는 다르다. 공동화는 형식을 그대로 둔다. 선거도 의회도 정당도 멀쩡히 작동한다. 제도의 골격은 온전한데, 그 안에서 시민이 실제로 행사하던 권한만 빠져나간다.
그래서 공동화는 한 문장으로 규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형식이 유지되는 가운데 그 실질이 빠져나가는 사태다. 공동화를 알아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형식의 멀쩡함’이다. 제도가 겉으로는 정상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안이 비어 가는 과정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무너진 제도는 누구나 알아본다. 그러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내용만 비어 가는 제도는 알아채기 어렵다. 잠식에 맞서려면 변형되는 제도를 지목하면 되고, 권위주의화에 맞서려면 정지된 법과 동원된 강압을 지목하면 된다. 그러나 공동화에 맞서려면, 멀쩡해 보이는 형식 안에서 정확히 무엇이 빠져나갔는지를 먼저 밝혀내야 한다. 그 규명이 이 글의 과제다.
형식을 그대로 둔 채 실질을 비우는 이 사태를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19세기에 이미 묘사했다.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1835·1840)가 그린 ‘부드러운 전제(despotisme doux)’가 그것이다.[1] 토크빌이 그린 권력은 시민을 사슬로 묶거나 위협하지 않는다. 대신 시민을 온화하게 보살피고 사소한 일까지 대신 처리해 준다. 시민이라는 법적 지위는 그대로 둔 채, 시민이 본래 스스로 하던 일을 조금씩 대신 떠맡아 간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여전히 주권자라고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후견인의 보살핌에 자신의 결정을 내맡기는 처지로 미끄러져 간다. 토크빌의 이 묘사가 알려 주는 바는 분명하다. 민주주의의 비워짐은 후기 자본주의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오래전부터 따라붙은 위험이다.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름을 바꿔 되돌아온 것이다.
형식은 남고 실질이 빠져나간다면, 다음으로 따져야 할 것은 그 ‘실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2. 무엇이 빠져나가는가
민주주의에서 빠져나가는 실질의 후보는 넷이다. 참여, 대표, 결정권, 그리고 갈등이 다루어지는 자리다. 먼저 풀어야 할 물음은 이렇다. 이 넷은 하나의 과정인가, 아니면 서로 무관한 여러 과정이 겹쳐진 것인가?
답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다. 이 넷은 하나의 단일한 과정도 아니고, 무관한 과정들의 단순한 합도 아니다. 이 넷은 하나의 되먹임 회로(回路, feedback loop)를 이룬다. 그 회로의 무게중심에 결정권의 유출이 있고, 결정권의 유출은 갈등의 봉합과 서로 맞물려 작동한다.
회로(Loop)의 무게중심은 결정권의 유출이다. 공동의 일에 관한 결정 권한이 시민의 광장을 떠나 다른 자리로 옮겨 간다. 시장으로, 기업 이사회로, 뽑지 않은 전문가에게로, 채권자에게로 옮겨 간다. 이 유출이 일어나면 나머지 셋이 잇따라 소멸한다. 시민이 결정할 사안 자체가 사라지므로 참여의 동기가 따라서 사라진다. 광장에 모여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으면 그 모임은 결정의 절차가 아니라 형식적 의례가 된다. 또한 시민이 뽑은 대표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결정 권한이 대표의 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표와 그를 뽑은 시민 사이의 책임 관계가 끊어진다. 표를 던져도 대표가 결정권을 쥐지 못하므로 그 표는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다툴 대안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갈등이 다루어지던 자리도 닫힌다. 중요한 결정이 이미 다른 곳에서 내려진 뒤라면, 광장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결과를 바꾸지 못하는 형식적 절차로 남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결정권의 유출이 원인이고 나머지 셋은 그 결과다. 그런데 이 인과의 방향이 거꾸로 작동하는 경로가 하나 있다. 갈등의 봉합이 거꾸로 결정권의 유출을 부추기는 경로다. 만약 갈등이 살아 있다면, 결정권이 광장 바깥으로 옮겨 갈 때 반드시 저항에 부딪힌다. 누군가 “왜 그 결정을 시민이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내리는가”라고 물으면 유출은 그 지점에서 멈칫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져 물을 자리를 미리 닫아 두면, 즉 자연스러운 갈등이 일어날 자리가 사라지면, 결정권의 유출은 아무런 저항 없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결정권과 갈등은 한쪽이 다른 쪽을 강화하는 짝을 이룬다. 결정권이 빠져나가면 다툴 사안이 없어져 갈등의 자리가 닫히고, 갈등의 자리가 닫히면 결정권은 더 쉽게 빠져나간다. 참여와 대표의 위축은 이 회로(Loop)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다.
이제 둘째 갈래를 회로(Loop)에 더한다. 정보 생태계의 오염과 공론장의 소멸이다. 이것은 빠져나가는 다섯 번째 후보가 아니다. 이것은 앞의 회로(Loop)를 가속하고 동시에 은폐하는 조건이다. 공론장이 살아 있으면 결정권의 유출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시민이 그것을 두고 논쟁할 수 있다. 결정 권한이 어디로 어떻게 옮겨 갔는지가 보이고, 그것이 보이면 시민은 그것을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공론장이 무너지면 그 유출은 시민의 시야 밖에서 진행된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Ein neuer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2022)에서 분석한 ‘반쪽 공론장’이 바로 그 무너진 상태다.[2] 디지털 플랫폼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허물고, 포용성과 진실 추구라는 공론장의 기능을 약화하며, 시민을 파편화된 집단으로 흩어지게 한다. 그 결과 공적 토론은 절반의 기능만 남는다. 뮐러(Jan-Werner Müller)가 지적한 매개 기구 — 정당과 전문 언론 — 의 약화도 같은 사태를 가리킨다.[3] 매개 기구는 사실과 거짓을 걸러 내고 시민과 대표를 이어 주던 장치다. 이 장치가 무너지면 앞서 말한 대표의 책임 관계가 한 번 더 끊어진다. 거를 장치가 사라진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비워짐은 더 조용하고 더 빠르게 진행된다. V-Dem 연구소는 표현의 자유가 권위주의화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침식되는 권리임을 지표로 보여 준다.[4][21] 공론장의 소멸이 민주주의 붕괴의 앞선 징후라는 뜻이다.
이로써 비워짐이 작동하는 회로(Loop)의 구조를 밝혔다. 다음으로 물을 것은, 민주주의를 진단해 온 이론가들이 과연 이 회로(Loop)를 같은 구조로 파악하는가 하는 점이다.
3. 진단의 오르막
네 명의 진단가는 모두 같은 사태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민주주의의 형식 — 선거·의회·정당 — 은 그대로 작동하는데, 그 형식이 담아야 할 실질, 곧 시민이 공동의 일을 실제로 결정하는 권한이 빠져나가는 사태다. 1장에서 규정한 공동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네 사람은 이 공동화를 저마다 다른 측면에서 분석하고, 따라서 서로 다른 처방을 내놓는다. 그들의 진단은 한 계단씩 깊어진다. 크라우치는 결정권이 어디로 옮겨 갔는지를 지적하고, 월린은 그 이동을 떠받치는 체제 전체를 분석하고, 무페는 시민이 다툴 자리가 왜 닫혔는지를 묻고, 발리바르는 그 닫힌 갈등의 밑에 깔린 물질적 불평등까지 파고든다. 계단을 오를수록 진단이 깊어지고, 깊어진 진단은 다음 계단에서 더 근본적인 처방을 요구한다.
첫 계단 —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 크라우치(Colin Crouch)는 『포스트 민주주의』(Post-Democracy, 2004)에서 이 사태에 이름을 붙인다.[5] 선거도 의회도 정당도 그대로 있지만, 공공 정책의 실제 결정은 선출된 대표가 아니라 기업 엘리트와 로비스트, 전문가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시민은 그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 잘 연출된 선거 경쟁을 지켜보는 관객의 자리로 물러난다. 무대 위의 토론과 경쟁은 활발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은 무대 바깥에서 이미 끝나 있다. 크라우치는 이 상태를 민주주의의 죽음이 아니라 ‘이후(post)’라고 규정한다. 민주주의의 제도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 제도가 시민의 실질적 통제력을 잃은 채 형식만 유지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크라우치의 분석은 2장에서 세운 회로(Loop) 가운데 두 자리를 함께 비춘다. 결정권이 시민의 손을 떠나 다른 행위자에게 넘어가는 자리(결정권의 유출)와, 그 결과로 시민의 참여가 의미를 잃는 자리(참여의 위축)다. 여기서 같은 공동화를 다른 측면에서 분석하는 한 사람을 나란히 둘 만하다. 브라운(Wendy Brown)은 신자유주의가 시민을 ‘정치적 주체’에서 ‘경제적 인간’으로 바꾸어, 시민이 자신을 시장의 경쟁자로만 이해하게 만든다고 분석한다. 시민이라는 주체 자체가 변형된다는 진단이다. 반면 크라우치는 주체가 아니라 제도를 분석한다. 시민의 성격은 그대로인데 엘리트가 결정권을 가로채 민주주의의 형식만 남긴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시민이 바뀐다’고 진단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제도가 포획된다’고 진단하지만, 두 진단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하나의 공동화가 드러나는 두 얼굴이다.
둘째 계단 — 월린의 뒤집힌 전체주의. 월린(Sheldon Wolin)은 같은 사태를 더 비관적으로 분석한다. 『관리되는 민주주의』(Democracy Incorporated, 2008)에서 그는 크라우치가 짚은 결정권의 유출을, 그 유출을 떠받치고 재생산하는 체제 전체의 작동 방식으로 끌어올린다.[6] 크라우치가 결정권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를 본다면, 월린은 그 이동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체제의 구조를 본다.
월린의 핵심 개념은 뒤집힌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ism)다. 고전적 전체주의는 국가가 경제를 장악하고, 대중을 광장으로 동원하며, 한 명의 독재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월린이 분석한 미국의 체제는 이 세 항목이 모두 거꾸로다. 국가가 기업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국가를 끌고 가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무관심 속으로 흩어 놓으며, 뚜렷한 독재자 없이 체제가 익명으로 작동한다. 고전적 전체주의가 사람들을 정치로 끌어모은다면, 뒤집힌 전체주의는 사람들을 정치에서 밀어낸다. 시민이 정치에 등을 돌리도록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것이 이 체제의 작동 원리다. 따라서 이때의 비워짐은 체제의 고장이 아니라, 체제가 의도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월린은 뒤집힌 전체주의와 짝을 이루는 개념을 하나 더 제시한다. 바로 도망치는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다. 그는 민주주의를 안정된 제도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들고일어나 잠시 출현하는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 사건이 제도의 틀에 고정되는 순간 민주주의 고유의 활력은 사그라든다고 본다. 이 개념은 뒤에서 처방을 다룰 때 다시 불러오기로 하고, 여기서는 월린의 진단이 슈미트(Carl Schmitt)와 어떻게 갈라지는지만 짚어둔다. 슈미트가 분석한 예외상태는 주권 권력이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사태다. 권력이 법 위로 올라서면서 민주주의의 형식 자체를 깨뜨린다. 월린의 뒤집힌 전체주의는 그 반대다. 법을 정지시키지 않는다. 법도 선거도 그대로 둔 채 그 안의 실질만 비운다. 슈미트가 분석한 것이 형식을 깨뜨리는 권위주의화의 작동 방식이라면, 월린이 분석한 것은 형식을 보존한 채 비우는 공동화의 작동 방식이다.
셋째 계단 — 무페의 탈정치. 무페(Chantal Mouffe)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다. 앞의 두 사람이 ‘무엇이 비는가’를 분석했다면, 무페는 ‘시민이 다툴 자리가 왜 닫혔는가’를 묻는다. 그가 내놓는 답이 탈정치(post-politics)다. 자유주의가 정치를 중도의 합의로 좁히면서, 사회에 실재하는 근본적 대립, 곧 적대(antagonism)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워 버렸다는 것이다. 좌우의 진정한 노선 대립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전문가의 정책 관리와 도덕적 공감대만 남는다. 정치가 ‘무엇이 옳은가를 둘러싼 대립’에서 ‘무엇이 합리적인가에 관한 합의’로 축소된 상태다.
그러나 무페가 보기에 적대는 억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합의의 정치에서 배제된 적대는 다른 출구로 분출한다. 제도 정치가 다루기를 거부한 불만과 분노가 우파 포퓰리즘의 형태로 터져 나온다. 갈등을 지운 자리에 더 거칠고 통제하기 어려운 갈등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무페의 처방은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가 경합(agonism)이라 부르는 길이다. 적대를 지우지 말되,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적(enemy)으로 대하는 관계를, 같은 규칙 아래 경쟁하는 대등한 맞수(adversary)로 대하는 관계로 전환한다. 무페가 이 적-친구(friend-enemy) 구도를 슈미트에게서 빌려 왔다는 점은 짚어 둘 만하다. 정치의 본질이 적과 친구를 가르는 데 있다는 슈미트의 위험한 통찰을, 무페는 민주주의 안으로 들여와 그 적대를 절멸의 논리가 아니라 경쟁의 논리로 길들이려 한다.
넷째 계단 — 발리바르의 내재적 모순.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비판의 칼끝을 한 번 더 돌린다. 앞의 세 사람은 비워짐의 원인을 민주주의 ‘바깥’에 두었다. 엘리트가, 기업이,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비운다고 보았다. 발리바르는 그 비판을 민주주의 자신에게로, 그리고 무페가 내놓은 처방 자체에게로 돌린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무페의 경합에는 함정이 있다. 무페의 처방은 대칭적 경합주의(symmetrical agonism)다. 맞수들이 대등한 위치에서 같은 규칙을 지키며 경쟁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은 대등하지 않다. 둘을 대등한 경쟁자로 놓는 순간, 둘 사이에 실재하는 물질적 비대칭 — 한쪽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다른 쪽은 노동력만 가지는 구조적 불평등 — 이 분석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발리바르는 성문 헌법이 규정하는 형식적 헌정(constitution formelle) 아래에, 권력과 대항권력의 비대칭적 갈등으로 짜인 물질적 헌정(constitution matérielle)이 깔려 있다고 본다.[7] 법 앞의 평등이라는 형식적 대칭의 밑에, 구조적 지배라는 물질적 비대칭이 늘 깔려 있다는 통찰이다. 적대를 담론의 차원에서 경합으로 전환하려는 무페의 기획은, 그 전환을 가로막는 물질적 조건 —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계급에 따라 선별적으로 집행되는 법 — 을 분석하고 바꾸지 못하는 한 실패한다. 대등한 경쟁이라는 외양은 세워지지만, 그 외양의 이면에서 기존의 지배 관계가 그대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바로 이것이 또 하나의 공동화(hollowing-out)이자 과두화라고 본다.[8] 비워짐을 막으려는 처방인 대칭적 경합이 도리어 비대칭적 지배를 은폐해 또 다른 비워짐을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워짐의 가장 깊은 층이 드러난다. 비워짐은 자본이 민주주의를 바깥에서 공격하는 사태만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자신의 처방으로 스스로를 다시 비울 수도 있다. 그 처방이 형식과 담론의 차원에 머문 채 물질적 불평등을 건드리지 못할 때 그렇다. 발리바르가 오늘의 위기를 자본의 외부 공격이 아니라 ‘민주주의 안의 내재적 모순’으로 읽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9] 한 해설자는 발리바르의 이 논점을 ‘경합에서 봉기로’ 나아가는 길로 정리한다.[10] 대칭적 경합조차 그 밑을 보면 비대칭적 지배 위에 서 있으므로,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그 비대칭을 직접 겨누는 갈등, 곧 봉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워짐을 외부의 공격으로만 분석하면 이 가장 깊은 층을 놓치게 된다.
진단이 네 계단을 올랐다. 크라우치가 분석한 결정권의 유출에서 시작해, 월린이 분석한 체제, 무페가 분석한 닫힌 갈등을 지나, 발리바르가 분석한 내재적 모순에 이르렀다. 각 계단은 앞 계단이 답하지 못한 결핍을 하나씩 남겼다. 이제 처방이 그 계단을 따라 오를 차례다.
4. 처방은 층층이 쌓아 올린 하나의 탑이다
3장의 오르막에서 각 계단은 앞 계단이 답하지 못한 결핍을 하나씩 남겼다. 처방은 그 결핍을 차례로 메운다. 그래서 처방으로 제시되는 세 가지 — 경합, 봉기, 설계 — 는 서로 경쟁하는 선택지가 아니라, 아래 층이 위 층을 떠받치는 하나의 탑처럼 차례로 쌓인다. 앞의 것이 남긴 결핍을 뒤의 것이 메워 준다. 셋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셋을 차례로 쌓아 올리는 문제다.
첫째 층 — 경합. 첫째 층은 경합(agonism)이다. 경합은 비워짐에 맞서는 처방이 무엇을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지를 가리킨다. 닫힌 갈등의 자리를 다시 여는 일이다. 무페의 진단대로 공동화의 한 축이 갈등의 봉합이라면, 그 처방은 봉합된 갈등을 되살려 시민이 다시 다툴 자리를 마련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경합은 그 출발점을 정확히 가리킨다. 그러나 경합은 결핍을 남긴다. 3장에서 발리바르가 지적한 함정이다. 경합이 갈등을 대칭적인 것으로, 곧 대등한 맞수들의 경쟁으로 다루면, 그 갈등의 밑에 깔린 물질적 비대칭을 은폐한다. 갈등을 되살리라는 처방은 옳지만, 그 갈등을 대칭으로 설정하는 순간 처방 자체가 또 다른 비워짐의 통로가 된다.
둘째 층 — 봉기. 둘째 층은 봉기다. 봉기는 경합이 남긴 결핍, 곧 갈등을 대칭으로 다룬 데서 생긴 결핍을 메운다. 발리바르의 봉기적 민주주의(insurgent democracy)는 대등한 맞수들의 대칭적 경쟁이 아니라,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 사이의 비대칭적 갈등을 민주주의의 중심에 놓는다. 그 바탕에 물질적 헌정의 통찰이 있다.[7] 법 앞의 평등이라는 형식적 대칭의 밑에 구조적 지배라는 물질적 비대칭이 늘 깔려 있으므로, 갈등은 대등한 경쟁이 아니라 그 지배를 정면으로 겨누는 비대칭적 싸움이라야 비워진 자리를 실제로 채운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봉기는 헌정을 버리고 봉기를 택하라는 뜻이 아니다. 해방을 향한 봉기의 힘을 헌정 바깥이 아니라 헌정의 한복판에 두라는 뜻이다.[11] 이 민주주의는 지배 집단을 비판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최대로 감수하고, 언제든 반대자가 될 수 있는 시민에게 최대의 권력을 부여한다. 곧 자신의 취약함을 감수하는 데서 힘을 얻는 민주주의다. 그러나 봉기는 방향만 제시할 뿐, 그 방향이 도달할 구체적 자리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비대칭적 갈등을 어느 쪽으로 밀고 가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만, 그 갈등이 실제로 자리 잡을 장소는 비워 둔다.
셋째 층 — 설계. 셋째 층은 설계다. 설계는 봉기가 비워 둔 그 자리를 채운다. 곧 결정권이 실제로 옮겨 가고 비대칭적 갈등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의 장소를 짓는 일이다. 봉기가 ‘갈등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에 답한다면, 설계는 ‘그 갈등이 어디에 자리 잡을 것인가’에 답한다. 봉기가 방향이라면 설계는 장소다.
이로써 세 처방이 서로 다른 갈래가 아니라 하나의 답을 이루는 세 층위임이 분명해진다. 경합이 갈등을 되살릴 필요를 열고, 봉기가 그 갈등을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바로잡고, 설계가 그 비대칭적 갈등이 머물 제도의 장소를 짓는다. 세 층은 차례로 쌓이며, 앞 층의 결핍을 뒤 층이 메운다. 그렇다면 마지막 물음은 이것이다. 광장에서 빠져나간 결정권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다시 채워지는가?
5. 결정권을 어디서 되채우는가
회로(Loop)의 무게중심이 결정권의 유출이었으므로, 처방이 도달할 자리도 결정권이다. 광장에서 빠져나간 결정 권한을 다시 채울 구체적 장소를 찾는 일이 5장의 과제다. 그 장소로 나는 일터를 제안한다. 사람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낸다. 그런데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은 공적인 일을 함께 결정할 권한을 가지는 반면, 같은 사람이 일터에서는 그런 권한을 거의 갖지 못한다. 고용된 사람은 자신의 노동이 어떻게 쓰일지, 회사가 무엇을 생산하고 이익을 어떻게 배분할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대체로 배제된다. 그래서 일터에서 결정권을 되채우는 일은, 고대 그리스의 용어로 옮기면 오이코스(oikos)를 폴리스(polis)로 바꾸는 일이다. 생계를 꾸리는 사적 살림의 공간을, 구성원이 공동의 일을 함께 결정하는 정치의 공간으로 여는 일이다.
이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정치에서는 민주주의가 옳다고 하면서 경제에서는 소수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순을, 제도 설계로 풀려는 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 셋을 살펴본다.
달 — 자치의 원리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달(Robert Dahl)은 『경제 민주주의 서설』(A Preface to Economic Democracy, 1985)에서 하나의 일관성 문제를 제기한다.[12] 우리가 국가를 민주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의 근거가 되는 자치의 원리는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시민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므로 시민이 그 결정에 참여해야 한다면, 기업 역시 거기서 일하는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므로 그 사람이 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달이 보기에 기업은 사적 소유물이기 이전에 하나의 통치체이고, 통치체라면 그 안의 사람들이 다스림에 참여하는 것이 자치의 원리에 맞는다. 그러므로 자치의 원리는 국가에서 멈추고 회사 문 앞에서 사라질 이유가 없다. 달은 이 논리의 귀결로 노동자가 함께 다스리는 자치 기업을 제시한다.
라이트 — 이룰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리얼 유토피아. 라이트(Erik Olin Wright)는 『리얼 유토피아』(Envisioning Real Utopias, 2010)에서 한 가지 긴장을 직시한다.[13] 바람직한 제도는 대개 실현 불가능해 보이고, 실현 가능한 제도는 대개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는 긴장이다. 라이트는 이 둘을 함께 충족하는 제도, 곧 바람직하면서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리얼 유토피아(real utopias)라 부른다. ‘유토피아’라는 말로 더 나은 사회의 이상을 가리키되, ‘리얼’이라는 말로 그것이 공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제로 지을 수 있는 제도임을 못 박는다. 노동자 협동조합이 그 대표적 사례다. 라이트는 이런 제도를 자본주의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혁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부에 비자본주의적 공간을 조금씩 늘려 그 지배력을 안에서부터 줄여 가는(eroding) 길로 읽는다. 협동조합 하나하나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작은 영역을 만들고, 그런 영역이 늘어날수록 자본주의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페이트만 — 일터는 민주주의를 익히는 학교다. 페이트만(Carole Pateman)은 『참여와 민주주의 이론』(Participation and Democratic Theory, 1970)에서 민주주의를 선거 절차로 좁히는 현실주의 이론에 맞선다.[14] 그 이론은 민주주의를 정치 엘리트를 선출하는 주기적 절차로 이해하고, 시민의 일상적 참여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페이트만은 이를 뒤집는다. 사람은 민주주의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익혀야 하는데, 그 익힘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일터라는 것이다. 사람은 일터에서 동료와 함께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의 결과를 함께 감당하면서, 공동의 일에 참여하는 능력과 책임감을 기른다. 그렇게 일터에서 기른 능력이 정치 공동체의 참여로 이어진다. 이 논리에서 일터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장소이자 동시에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다.
세 사람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자치의 원리가 기업에도 적용되어야 하고(달), 그런 기업이 공상이 아니라 실제로 지을 수 있는 제도이며(라이트), 그 기업이 시민을 길러 내는 학교이기도 하다(페이트만)는 것이다. 결정권을 일터에서 되채운다는 이 글의 처방은 이 설계 전통 위에 서 있다.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김현제, 2026)의 자리 — 결론이 아니라 한 사례. 여기서 나의 최근작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이 이 글과 만난다.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은 임직원공동소유기업을 다룬다. 기업의 소유를 외부 자본이 아니라 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분산시켜, 광장에서 빠져나간 결정권을 일터라는 자리에서 되돌리려는 시도다. 앞의 설계 전통을 실제 제도로 구체화한 한 가지 방안이다.
다만 이 글에서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은 이 글의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예시다.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은 결정권을 일터에서 되채우는 여러 설계 가운데 하나의 정교하게 다듬어진 사례로서 이 글에 들어오는 것이지, 이 글이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일터에서 결정권을 되채우는 방안은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이 주장하는 임직원공동소유기업 외에도 여럿 있을 수 있다. 로머(John Roemer)가 제시한 시장사회주의는 자본이 낳는 소득을 사회가 나누는 길이고,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의 기본소득은 일터 바깥에서 시민에게 밑천을 대는 길이다.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은 그 가운데 일터 안에서 소유와 권력을 함께 묻는 한 갈래에 해당한다. 방향을 달리하는 처방도 있다. 가브리엘(Markus Gabriel)의 윤리적 자본주의(ethischer Kapitalismus, 독)는 같은 과녁을 본다 — 자본주의를 고쳐 민주주의를 구하는 일이다.[19] 그러나 그 처방은 회사 안에 윤리를 담당하는 기능을 두고 윤리적 소비 시장을 세우는 데 머문다. 소유와 결정권의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윤리라는 기능을 덧대는 것이다. 이는 앞서 본 ‘소유만 나누고 갈등의 자리를 살려 두지 않는’ 경우보다 한 칸 더 얕다. 결정권의 비대칭이라는 무게중심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럿 가운데 하나라는 이 위치를 분명히 해 두어야,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의 사례가 갖는 의미가 과장되지 않는다.
발리바르의 단서 — 설계는 완성된 평등이 아니라 영속하는 갈등의 자리다.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을 한 사례로 들이되, 3장에서 발리바르가 남긴 단서를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발리바르라면 임직원공동소유기업에 이렇게 물을 것이다. 기업의 지분을 노동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권력 비대칭이 저절로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소유를 분산해도 누가 실제로 결정하는가의 문제, 곧 권력의 비대칭은 그대로 남을 수 있다.[15] 만약 소유만 나누고 갈등의 자리를 함께 살려 두지 않으면, 임직원공동소유제도는 ‘대칭적 경합의 함정’에 빠진다. 구성원이 모두 공동 소유자라는 외양 아래에서, 실제로는 결정 권한의 비대칭이 그대로 작동하는 상태다. 이것은 동료애라는 외양 뒤에서 지배가 재생산되는, 일터 규모의 작은 공동화다. 3장에서 본 바로 그 공동화가 일터 안에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계가 도달해야 할 자리는 ‘완성된 평등의 상태’가 아니다. 한 번의 제도 설계로 평등이 달성되어 더는 다툴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비대칭을 끊임없이 다시 문제 삼는 갈등이 영속하는 자리라야 한다. 발리바르의 갈등적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가 도달해 안정시킬 체제가 아니라 갈등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고쳐 가는 과정이듯,[16] 일터의 민주주의도 한 번 세우면 완성되는 제도가 아니라 날마다 다시 여는 과정이라야 산다. 비워진 결정권은 한 번의 설계로 되채워지지 않는다. 날마다 다시 채워야 한다. 「권력을 공유하는 기쁨」에서 노사협의회를 갈등이 사라져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살려 두어야 할 신호로 읽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갈등이 사라진 일터는 평화가 이루어진 일터가 아니라, 비대칭을 따져 물을 자리가 닫힌 일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계의 자리까지 처방이 도달했다. 그런데 일터 하나의 설계가 과연 체제 전체의 기울기를 견딜 수 있는가. 이 물음이 마지막 장으로 이어진다.
닫는 글 — 한 칸이 체제를 버티는가
5장은 일터를 결정권을 되채우는 자리로 세웠다. 그러나 이 처방에는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반론이 있다. 일터 하나를 아무리 잘 설계해도, 그 일터가 놓인 체제 전체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있다면 그 설계가 무슨 소용인가 하는 반론이다. 이 반론을 가장 무겁게 제기하는 사람이 슈트렉(Wolfgang Streeck)이다.
슈트렉은 『시간 벌기』(Gekaufte Zeit, 2013)에서 후기 자본주의 국가가 처한 곤경을 분석한다.[17] 그가 보기에 오늘의 국가는 두 주인을 섬긴다. 하나는 자신을 뽑아 준 시민(Staatsvolk)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Marktvolk)다. 국가가 빚에 의존할수록 이 둘 사이의 무게는 채권자 쪽으로 기운다. 빚을 갚지 못하면 국가의 신용이 무너지므로, 국가는 시민의 요구보다 채권자의 눈치를 먼저 살피게 된다. 그 결과 국가의 응답은 점점 시민에게서 채권자에게로 옮겨 간다. 슈트렉이 그리는 것은 개별 정치인의 배신이 아니라 구조의 기울기다. 누가 집권하든, 빚에 의존하는 국가는 채권자에게 응답하는 쪽으로 끌려간다.
이 분석을 일터의 설계에 들이대면 날카로운 물음이 생긴다. 한 기업 안에서 소유와 권력을 아무리 민주적으로 다시 짠다 해도, 그 기업은 여전히 슈트렉이 그린 체제 안에 놓여 있다. 그 체제 전체가 채권자에게 응답하며 시민의 결정권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일터 한 칸의 민주적 설계가 그 거대한 기울기를 거슬러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슈트렉이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한 칸의 거푸집이 체제 전체의 기울기를 정말로 버틸 수 있는가?
이 물음을 피하지 않고 답해야 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일터 하나의 설계가 체제 전체의 기울기를 혼자서 뒤집을 수는 없다. 슈트렉의 구조 분석은 옳고, 그 기울기는 실재한다. 임직원공동소유기업 하나가, 혹은 그런 기업 여럿이 생긴다고 해서 국가가 채권자에게 응답하는 구조가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설계의 힘을 과장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설계가 체제를 혼자 이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워짐에 맞서는 전선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럿이다. 광장에도 있고, 소유에도 있고, 소득에도 있고, 조세와 부채를 다루는 국가의 재정에도 있다. 일터의 설계는 그 여러 전선 가운데 하나다. 하나의 전선이 전체를 뒤집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전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일터의 설계가 하는 일은 체제를 단번에 뒤집는 것이 아니라, 비워진 결정권을 실제로 사람의 손에 되돌리는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실물 하나다. 슈트렉의 비관이 옳다 해도, 그 비관이 이 실물의 가치를 지우지는 못한다. 오히려 체제의 기울기가 그토록 무겁다는 사실이, 그 기울기에 맞서는 구체적 거점을 하나라도 세우는 일의 필요를 더 분명히 한다.
다만 슈트렉이 제기한 물음의 나머지 절반은 이 글이 다 풀 수 없다. 국가의 부채가 어떻게 쌓이는지, 국제적 패권이 그 부채의 조건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조세가 어떻게 그 기울기를 키우거나 줄이는지는 정치철학의 물음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의 물음이다. 이 글은 ‘왜 민주주의가 비워지는가’를 물었다. 그 비워짐을 굴리는 부채와 패권과 과세의 실제 작동은 정치경제학이 답할 몫으로 넘긴다.[18] 정치철학이 비워짐의 구조와 처방의 방향을 짚었다면, 그 처방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물질적 조건은 정치경제학과 조응하며 다시 다루어야 한다.
이제 여는 글에서 비워 두었던 주어를 채울 수 있다. 누가 민주주의를 비우는가? 답은 하나의 얼굴을 가진 악당이 아니다. 결정권의 유출과 갈등의 봉합이 서로를 강화하는 되먹임 회로(feedback loop)가 민주주의를 비우고, 무너진 공론장이 그 과정을 시민의 시야에서 가린다. 시장도, 기업 엘리트도, 선출되지 않은 테크노크라트도, 채권자도 모두 그 회로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누구 하나를 지목해 “이자가 범인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비우는 것이 특정한 행위자가 아니라 이 회로(Loop)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회로(Loop)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민주주의 자신이 있다. 민주주의가 자신의 처방을 형식과 담론에 머무르게 하고 물질적 불평등을 건드리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다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를 비운다.
한 가지 물음을 더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이 글은 발리바르를 따라, 지배를 보려면 입장을 취해야 하며 중립적 자리는 없다는 쪽에 섰다. 그런데 가브리엘(Markus Gabriel)은 정반대로 객관적 도덕 사실이 있다고 단언하며 묻는다. 진리와 가치의 객관성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탈진실의 권위주의에 맞설 것인가.[20] 공동화를 걱정하는 글이라면 이 물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글의 자리는 그 물음과 부딪히지 않는다. 이 글이 진단한 물질적 비대칭 — 한쪽은 생산수단을 쥐고 다른 쪽은 노동력만 가지는 구조적 지배 — 은 누가 어떤 입장을 취하든 실재하는 사실이다. 곧 지배의 비대칭이 실재한다는 사실의 객관성은 끌어안을 수 있다.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말은 그 사실을 부정하는 뜻이 아니라, 그 사실에 어떻게 응답할지에는 중립적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사실의 객관성과 응답의 당파성은 양립한다. 탈진실에 맞서는 힘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서가 아니라, 실재하는 지배를 직시하고 거기에 응답하기로 선택하는 데서 나온다.
그렇다면 비워진 민주주의를 다시 채울 수 있는가? 나는 채울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끝나지 않는 비대칭적 갈등의 형태로만 채울 수 있다. 비워짐이 한 번의 사건으로 완결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되채움도 한 번의 설계로 완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번 이루면 끝나는 성취가 아니라 날마다 다시 여는 과정이다.
참고문헌
일차 문헌 — 사상가 저작
-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1835·1840).
-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 『포스트 민주주의』(Post-Democracy, 2004).
- 셸던 월린(Sheldon Wolin), 『관리되는 민주주의』(Democracy Incorporated: Managed Democracy and the Specter of Inverted Totalitarianism, 2008); 「도망치는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 1994); 『정치와 비전』(Politics and Vision, 1960; 증보 2004).
- 샹탈 무페(Chantal Mouffe), 『민주주의의 역설』(The Democratic Paradox, 2000);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On the Political, 2005);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 2018).
-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대중들의 공포』(La crainte des masses, 1997); 『개념의 정념들』(Passions du concept, 2020).
- 칼 슈미트(Carl Schmitt),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 1932);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 1922).
-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Ein neuer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und die deliberative Politik, 2022).
- 얀-베르너 뮐러(Jan-Werner Müller), 『누가 포퓰리스트인가』(What Is Populism?, 2016).
- 웬디 브라운(Wendy Brown), 『민주주의 살해하기』(Undoing the Demos: Neoliberalism’s Stealth Revolution, 2015).
- 로버트 달(Robert Dahl), 『경제 민주주의 서설』(A Preface to Economic Democracy, 1985).
-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 『리얼 유토피아』(Envisioning Real Utopias, 2010).
- 캐럴 페이트만(Carole Pateman), 『참여와 민주주의 이론』(Participation and Democratic Theory, 1970).
- 존 로머(John Roemer), 『사회주의의 미래』(A Future for Socialism, 1994).
- 필리프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Real Freedom for All, 1995).
- 볼프강 슈트렉(Wolfgang Streeck), 『시간 벌기』(Gekaufte Zeit: Die vertagte Krise des demokratischen Kapitalismus, 2013).
-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좋은 일을 하다 — 윤리적 자본주의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구하는가』(Gutes tun: Wie der ethische Kapitalismus die Demokratie retten kann, 2024); 『도덕적 사실 — 왜 존재하며 어떻게 인식하는가』(Moralische Tatsachen, 2025).
해설·이차 문헌
- 장진범, 「에티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 — 갈등적 민주주의와 물질적 헌정」.
- 배세진, 「에티엔 발리바르의 ‘갈등적 인식론’에 관하여」.
- Lorenzo Buti, “From agonistic to insurgent democracy,”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2025.
- Luigi Goldoni & Michael Wilkinson, “The Material Constitution,” Modern Law Review, 2018.
- V-Dem 연구소(Varieties of Democracy Institute), 「민주주의 보고서 2026 — 민주주의 시대의 해체?」(Democracy Report 2026: Unraveling the Democratic Era?,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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