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무엇을 남기는가

학교는 무엇을 남기는가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 〉 '아빠의 앙가주망' 장 〉 '보육·교육' 편의 셋째 글이다. 편을 연 얼굴 글 「맞이하고 기르는 일」은 책에만 싣고, 둘째 글 「대물림되는 출발선」이 앞을 받친다. 얼굴 글이 무엇을 기를 것인가를 답했고, 앞의 논설이 누가 배우는가를 물었다면, 이 글은 학교·교사·대학이라는 제도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주제별 진단은 Research 〉 Theme research의 보육/교육에서 다룬다. 『네 덕에 사람답게 되어 간다』(출간 준비 중)에 실을 글을 웹에 맞게 고쳤다. 게시일 2026-07-28.


학교가 쓸모를 다했다는 말

기계가 무엇이든 답을 내주는 시대가 되자 대학이 쓸모를 다했다는 말이 나온다. 비싼 등록금 내고 배운 것은 언제든 기계가 알려 줄 테니, 차라리 일찍 일터로 가서 경력을 쌓는 게 낫다는 논리다. 한발 더 나간 말도 나온다. 기계가 저마다의 과외 선생이 되어 줄 테니,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는 말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배움의 의미와 역할에 뿌리부터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앞의 글에서 나는 이 시대의 교육이 길러야 할 것을 두 가지로 꼽았다. 기계가 내놓은 답을 따져 묻는 힘, 그리고 사람과 부대끼며 관계를 맺는 힘.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서 길러야 하며, 누가 길러 줄 것인가? 학교는, 교사는, 대학은 이 시대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학교가 쓸모를 다했다는 말이 맞는지부터 따져 보자.

안개 속에서 배워야 할 것

대학을 건너뛰고 일터에서 배우라는 조언에는 숨은 전제가 있다. 어떤 일이 살아남을지 알 수 있다는 전제다. 일터에서 배우는 것은 언제나 값지다. 그러나 그 배움이 계속 힘을 발휘하려면 그 일이 계속 쓰여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 혁명에 막 발을 내딛은 오늘날 확실한 사실은 하나뿐이다. 미래의 일이 몹시 불확실하다는 것. 인공지능을 개척한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이 분야의 앞날을 안개에 비유했다.[1] 바로 앞은 보일지 몰라도 그다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는 지도 한 쪽을 달달 외워 봐야 큰 의미가 없다. 당장 내일 내가 외운 지형이 사라지고, 다음 쪽에 그려진 지형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가는 것은 지금 유용해 보이는 기술이 아니라 생각하는 기술이다. 읽고, 쓰고, 따져 묻고, 증거를 가려내는 기술. 낯선 지형과 갑작스러운 장애물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지식을 종합해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지, 달달 외운 지도책이 아니다.

당장 유용한 기술을 멀리하라는 말이 아니다. 계산기가 등장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사람보다 월등히 빠른 계산기를 책상마다 들였는데도 우리는 셈의 원리를 가르쳤다. 손 계산의 품을 기계에 넘겼을 뿐이다. 워드 프로세서가 자동으로 맞춤법을 검사해도 글은 사람이 쓴다. 기계가 개요를 잡고 초안을 쓰고 요약까지 하는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개념과 논리는 사람이 익히고, 손이 가는 실행은 기계에 맡긴다. 기계를 부려 뜻한 바를 이루는 사람은 기계의 언어를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경중완급과 선후좌우를 판단하고 가진 도구가 제 구실을 하는지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학교 무용론은 앞뒤가 바뀐 논리다. 미래를 안다면 학교가 덜 필요할지도 모른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근본을 가르치는 학교가 더 필요하다. 무용론은 앎을 가장한 무지 위에 서 있다.

지름길을 막는 담장

무엇을 가르칠지 윤곽이 드러났다. 어떻게 가르칠지를 생각할 때다. 여기에 이 시대 특유의 문제가 있다.

진정한 배움을 얻으려면 굳은살을 각오해야 한다. 이해는 연습을 반복해야 몸에 붙는다. 그런데 기계는 그 과정을 건너뛸 지름길을 제공한다. 과제를 대신 써 주고, 문제를 대신 풀어 준다. 다급한 상황에는 성실한 학생도 지름길을 택할 유혹에 빠진다. 앞의 글에서 나는 생각도 근육과 같아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게을리하면 가려내는 힘이 쓰지 않는 근육처럼 줄어든다고 썼다. 학자들은 이 문제의식에 탈숙련화(deskilling)라는 오래된 이름을 다시 붙였다.[2] 그런데 자라는 아이에게 더 무서운 일은 이미 기른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를 기회를 잃는 것이다. 어른에게는 잃을 힘이라도 있다. 아이는 아직 그 힘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지름길로 새는 것을 막아 줄 담장이 필요하다. 담장의 이름이 평가다. 집에 들려 보내는 과제, 지켜보지 않는 시험으로는 더는 배움을 재지 못한다.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주 앉아 치르는 시험, 말로 묻고 답하는 평가, 그 자리에서 종이와 칠판에 푸는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평가는 성적을 매기는 절차이기 전에, 지름길을 막아 배우는 사람이 제 근육으로 오르게 하는 담장이다.

마주 앉는 평가를 하려면 대면 수업을 해야 한다. 말로 묻는 평가를 제대로 하려면 교실이 작을수록 좋다. 이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기회가 늘어난다. 기술이 키워 놓은 규모와 표준화를 되감아, 오래된 가르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앞의 글에서 말한 관계 맺는 힘도 바로 그 부대낌 속에서 자란다. 물론 이 방법에도 약점은 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면 편견이 끼어들 수 있다. 표준 시험의 흠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마주 앉은 평가의 흠은 웬만해서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 이 회귀는 평가하는 사람의 어깨에 더 큰 책임을 얹는다.

교사는 늘려야 한다

기계가 빠르게 지식을 제공하는 시대에, 과연 교사는 필요한가?

당연하다. 오히려 더 필요해진다. 나는 오래전에 스승의 주된 역할이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고 썼다. 지식을 받아들이는 여러 관점을 건네고, 스스로 모범이 되는 일이라고 썼다. 그 글을 쓸 당시 그것은 나 개인의 교육관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계가 꽤 훌륭한 지식 전달자가 된 지금, 그것은 교사라는 직업의 일 그 자체다. 기계는 교사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일을 본모습으로 되돌린다.

되돌아온 일의 실물은 이렇다. 따져 묻기를 이끄는 사람. 아이가 기계의 답을 받아 적을 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사람. 마주 앉아 묻고 답하며 배움의 깊이를 재고, 편견에 휘둘릴 수 있는 평가의 눈금을 바로잡으며, 어려운 판정을 내리는 사람. 아이들이 서로 부대끼는 장을 열고 돌보는 사람. 어느 것 하나 기계가 대신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큰 교실에서 쉽게 되지 않는다. 앞서 주장한 평가 방식의 전환은 교사에게 더 많은 판단과 더 무거운 책임을 지운다. 그 짐을 감당하려면 교사의 수를 늘리고, 기르고, 제도가 받쳐야 한다.

그러니 방향은 분명하다. 기계의 시대는 교사를 줄일 때가 아니라 늘릴 때다. 양성과 배치와 권한을 어떻게 짤지는 다음 과제로 미루고, 여기서는 방향만 밝혀 둔다.

넓은 중간을 위하여

남은 문제가 가장 무겁다. 마주 앉는 평가, 작은 교실, 더 많은 교사 — 여기까지 그린 오래된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길은 비싸다.

작은 교실을 만들고 사람의 품을 늘리려면 치러야 할 값이 커진다. 그 값을 각자의 지갑에 맡기면 어찌 되는지, 앞의 두 글에서 이미 충분히 논증했다. 사람이 곁에서 이끄는 교육은 값비싼 것이 되고, 그 값을 치를 수 있는 집과 없는 집의 아이가 갈린다. 그 갈림을 우리는 팬데믹에서 이미 보았다. 학교가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이 전환도 똑같은 갈림길에 선다. 넉넉한 재단을 둔 사립 학교는 작은 교실을 차릴 수 있다. 제한된 세원에 의존하는 공립 학교는 그 일이 버겁다. 이 전환을 시장에 맡기면, 되돌아온 학교의 본모습이 다시 넉넉한 집 아이들만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전환의 비용은 공교육이 져야 한다. 사회가 함께 치러야 한다.

기계가 무엇이든 답을 내주니 제도권 교육은 쓸모를 다했다는 말의 허상도 여기서 드러난다. 기계를 과외 선생 삼아 배우려면 무엇을 물을지 알아야 하고, 돌아온 답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물을 줄 아는 소수는 어떤 환경에서도 배운다. 학교가 없던 시절에도 그런 사람은 배웠다. 제도권 교육이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소수가 아니라 넓은 중간이다. 대학 무용론은 알아서 배우는 소수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인 양 파는 것이다. 그 말을 따라 제도를 허물면 소수는 남고, 넓은 중간이 무너진다.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이니 교육에 드는 돈부터 줄이자는 셈이 또 나올 것이다. 앞의 글에서 나는 그 셈이 거꾸로 되었다고 적었다. 여기에 하나만 보탠다. 기계가 낳는 생산성의 열매가 바로 그 투자를 치를 수 있게 한다. 기계 덕에 사회가 더 벌게 된다면, 그 번 것의 첫 몫을 사람 기르는 일에 두어야 한다. 기계의 시대에 교육은 줄일 부문이 아니라 늘릴 부문이다.

이제 제목의 물음에 답한다. 학교는 무엇을 남기는가? 기계가 지식 전달을 가져가면, 학교에는 근본을 가르치는 일이 남고, 제 힘으로 부딪게 하는 담장이 남고, 관점을 건네고 모범이 되는 교사가 남는다. 남는 것들이 곧 본질이다. 그리고 학교가 아이에게 남겨야 할 것도 그것이다. 답이 아니라 답을 다루는 힘, 지식이 아니라 사람.


근거 자료

이 글의 논증은 한 편의 원문과 연구 메모 한 편에 기댔다. 본문에는 수치를 들이지 않고 논거만 빌려 내 언어로 옮겼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정리한다.

적응력 중심 교육과 평가의 전환 — 피넬로피 골드버그(Pinelopi Koujianou Goldberg, 예일대 경제학 교수, 전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대학 무용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이렇게 논증한다. 미래의 일이 불확실하므로 특정 직무 훈련이 아니라 적응력과 지적 독립을 길러야 하고, 그 답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근본 교육이다. 계산기와 컴퓨터가 산수 교육을 없애지 못했듯, 기계 시대에도 개념과 논리는 사람이 익히고 실행만 기계에 맡긴다. 기계가 과제 회피를 쉽게 하므로 평가는 대면 시험·구술 평가·실시간 문제 풀이로 옮겨야 하며, 그 귀결은 대면 수업과 작은 교실, 곧 오래된 가르침으로의 회귀다. 다만 소수 정예 교육은 비싸서 엘리트 기관은 감당해도 큰 공립대학은 버거우며, 팬데믹 원격수업이 격차를 벌렸듯 이 전환도 공교육 의존층에 불리할 수 있다. 제도 교육이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 배우는 소수가 아니라 넓은 중간(the broad middle)이며, 그러므로 사회는 교육에 대한 투자를 줄일 것이 아니라 늘려야 하고, 인공지능이 낳는 생산성 이득이 그 투자를 가능하게 한다. 마주 앉은 평가의 치우침 문제 — 표준 시험의 편향은 눈에 보이나 대면·구술 평가의 편향은 덜 투명하다 — 도 그가 단서로 붙인 것이다. (Goldberg, AI and the Future of Education, Project Syndicate, 2026. 1.)

탈숙련화와 그 너머 — 탈숙련화(deskilling)는 해리 브레이버만(Harry Braverman)이 『노동과 독점자본』(Labor and Monopoly Capital, 1974)에서 벼린 노동사회학의 고전 개념으로, 국내 교육·노동 문헌에서도 같은 역어로 통용된다. 인공지능 맥락에서는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를 비롯한 여러 논자가 학생들이 기계에 기대며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잃는 것을 걱정한다. 최근 의학 교육 연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기른 힘을 잃는 탈숙련화를 넘어 기초 역량을 배울 기회 자체가 박탈되는 상태를 '네버 스킬링(never-skilling)'이라 이름 붙여 경계했다(Ke et al., AI-Induced Never-Skilling, SSRN 프리프린트, 2026). 본문의 "처음부터 기를 기회를 잃는 것"이 이 갈래다.

연구 메모 — 「AI와 AGI의 도입이 노동 시장에 미칠 변화」((주)지우학, 2026. 2.)의 3절(교육 및 인적 자본의 변화)이 이 글의 밑그림이다. 적응력 중심 교육, 평가 방식의 전환, 비판적 사고의 상실 우려를 정리했다. 같은 메모의 노동 시장 진단(1·2절)과 분배 구상(4절)은 노동 편 「누가 사다리를 치웠는가」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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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1] 힌턴의 이 비유는 경제학자 피넬로피 골드버그가 전한 것이다. 골드버그는 안개에서 교육의 과제를 끌어냈다 — 안개 속에서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을 기르는 일.
↩ [2] 탈숙련화(deskilling)는 미국의 노동 연구자 해리 브레이버만(Harry Braverman)이 『노동과 독점자본』(Labor and Monopoly Capital, 1974)에서 벼린 개념이다. 기계와 관리가 일의 판단을 가져가면 일하는 사람의 숙련이 잘게 쪼개져 줄어든다는 진단으로, 노동 연구의 고전이 되었다. 인공지능 시대의 학자들은 이 개념을 배우는 사람의 사고력으로 넓혀 쓴다. 자세한 갈래는 글 끝 근거 자료에 적었다.